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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29 10:2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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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관리자
제목 : [국방일보]다시보는 6·25-<98>한국군의 창과 방패…이룡·박경원 장군
다시보는 6·25 - [군사기획]
<98>한국군의 창과 방패…이룡·박경원 장군
공격·방어전술 개발…국군 전술학의 뿌리

6·25전쟁 이전 육군보병학교 교수부의 술과(術科·현재 전술학과)에는 공격과 방어교관으로 이름난 두 장교가 있었다. 공격교관은 육사5기생의 이룡(李龍·함북 경성) 소령이고, 방어교관은 육사6기생의 박경원(朴敬遠·강원 고성) 소령이다. 국군에는 박경원이 또 있는데, 그는 중장(군영 출신)으로 전역해 내무장관을 지낸 박경원(朴璟遠) 장군이다.

이룡과 박경원은 전쟁 이전 국군의 전술 수준이 맹아(萌芽) 단계에 있을 때 육군보병학교에서 국군의 공격·방어전술을 개발, 정착시킨 주인공이다. 두 사람은 전쟁 이후 작전·교육 관련 직책을 주로 맡았다.이룡은 전쟁초기 육사·보병학교 교도대대를 통합한 혼성연대의 작전주임으로 보직돼 서부전선의 문산축선을 방어하고 있는 국군1사단의 증원부대로 투입된 후, 민기식부대 작전참모를 거쳐 송요찬 장군이 지휘하는 수도사단 작전참모로 일했다.

그는 송요찬 장군 밑에서 낙동강방어 시 사단작전참모로 경주 북방 전투를 치렀고,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진 시에는 양구·신고산전투, 안변·영흥·함흥·길주·청진·부령 진격작전, 흥남철수작전을 수행하며 수도사단을 상승(常勝)의 타이거(Tiger·맹호)부대로 만든 뛰어난 참모였다.

이후 동기생 가운데 가장 먼저 연대장으로 진출한 그는 수도사단 기갑연대장으로 맹활약을 펼쳤다. 그는 동해안에서 금강산 턱 밑의 전략거점인 월비산을 점령해 동해안의 전선을 북쪽으로 밀어 올리는 데 크게 공헌했고, 이후에는 지리산 공벌작전에 투입돼 혁혁한 전과를 올려 송요찬 장군의 신임을 듬뿍 받았다.

특히 1951년 6월 향로봉을 위협하는 향로봉 북쪽의 산두곡산 공격 시 송요찬 사단장은 이룡 연대장에게 “이번 공격은 작전의 명 참모였던 이룡 대령에게 맡기기로 결심했으니까 이번 작전을 통해 명 지휘관으로서의 명성을 얻도록 하라”는 격려를 받고 이를 조기에 탈취해 사단장의 기대에 부응하는 한편, 공격교관으로서의 위신도 세웠다.

이후 송요찬은 그의 뛰어난 능력을 높이 평가, 자신이 가는 곳마다 그를 불러 중용했다. 동기생 중 선두로 장군에 진출한 그는 5·16 때 강원도지사로 나갔다가 복귀 후 소장으로 예편했다. 그의 강직한 성품을 두고 동기생들은 그를 전형적인 군인이라 부른다.박경원은 일제 때 일본 육사에서 조교로 있다 광복 후 귀국해 육사6기로 임관했다. 이후 그는 이룡 장군과 함께 육군보병학교 방어교관으로 있으면서 국군의 전술을 개발했다.

전쟁 후 그는 육군보병학교·종합학교에서 계속 방어전술을 책임지는 방어반장의 직책을 수행하며 국군장교들의 뒤떨어진 전술학 수준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 1952년 12월 동기생 중 가장 먼저 연대장에 보직된 그는 국군 제일의 방어교관이라는 자긍심을 갖고 진(眞)백골부대인 18연대장에 부임했다. 당시 18연대는 화천 북방의 689고지를 놓고 중공·북한군과 뺏고 뺏기는 진지전을 전개하고 있었다.

낮에는 고지를 점령했다가 밤에는 적의 인해전술에 밀려 뺏기는 상황이 계속됐다. 이때 그는 “국군의 방어전술을 개발한 내가 이 고지를 빼앗기면 국군에 전술이 없는 것과 같다”며 뛰어난 작전술을 발휘, 이를 점령했다. 그는 이때 산화한 부하들을 잊지 못해 5·16 후 경북도지사로 임명받자 도지사 차량번호에 고지명을 차용, 689번으로 붙였다.

무골(武骨) 중의 무골이면서 부하에 대한 사랑이 지극했던 그는 동기생 중 제일 먼저 장군으로 진급한 후 소장으로 예편했다. 국군 전술학이 일천(日淺)한 시기, ‘창과 방패’를 상징하는 공격·방어전술을 개발했고, 이후 백골·맹호부대의 전통을 다진 두 사람은 오늘날 국군 전술학의 뿌리를 내리는 데 크게 공헌했다.


<남정옥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관>

[국방일보-2008.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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