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거제도 포로명단 DB 구축경위

※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에서는 국내 유일하게 보유하고 있는 미국에서 입수한 거제도포로 17만여명의명단에 대한 데이터베이스 구축작업을 시행·완료하였습니다.

민족의 비극과 전쟁의 상처를 간직한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역사적 의미와 가치를 재조명하고 한 민족의 뼈아픈 역사를 되새겨보고 자료를 정리함으로써 학술적 가치뿐만 아니라 후세에 좋은 교훈을 남겨야 할 것입니다.

※ 당시 유엔군이 작성한 문서이기때문에 모든 명단은 영문으로 작성되어 있고 한글표기를 영문으로 대체하다 보니 표현이 다소 미비한 점도 있으니 많은 양해 바랍니다.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역사적 배경

[거제도 포로수용소] 거제시 발간자료에서 발췌한것임.

가. 수용시설

거제도가 포로수용소 설치 장소로 확정되자 1951년 초부터 공사가 시작되었다.
몇개의 마을이 수용소 부지로 선정되고, 부산의 포로를 이곳으로 이동시키는 "알바니작전"이 계획되었다. 계획수립과정에서 처음에 구상된 시설은 6만명을 수용할 규모였으나, 나중에는 22만명의 포로를 수용하는 규모로 계획이 확대되었다.

포로수용소가 설치되었던 지역은 섬의 중앙에 해당하는 일우면 고현리(현 거제시 신현읍)를 중심으로 용산,장평,문동, 양정, 수월,제산리와 연초면의 임전,송정리(포로 공동묘지 지역), 그리고 동부면의 저구리 일대였다. 전쟁 후반에 포로 분산 작전이 실시되었을때는 이 섬의 남단 해상에 있는 봉암도 용초도에도 수용소가 설치되었다. 수용소가 들어선 지역은 대부분이 농토와 임야로서 정부가 이를 징발해서 사용하였다.

거제도는 포로를 안전하게 수용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는 이상적인 조건을 갖추고 있는것으로 보였지만, 수용소 시설 공사면에서는 어려운 점이 많은 곳이었다. 당시 미처 개발이 되지 않고 야산이 많았던 이 섬은 평지라고 할만한 곳이 많지 않았다. 평평한 땅이라고는 경작지로 대부분 논이었으므로, 물을 빼고 말려서 흙을 채워 넣어야 했다. 사용할 수 있는 도로도 거의 없었으므로, 도보길 또는 우마차길을 확장하거나 완전히 새로운 길을 만들어야만 했다. 해상으로 포로와 화물을 수송하기 위해서 선박이 접근할 수 있는 정박 공간과 시설도 새로이 만들지 않으면 안되었다.

고현지구에 포로수용소가 시설되고 있는 초창기 모습

[고현지구에 포로수용소가 시설되고 있는 초창기 모습]

그렇지만 공사는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수용소 시설은 부산 수용소와 거의 다름 없었다.
먼저 도착하는 포로들은 자신들이 수용될 장소에 울타리를 세우고 철조망을 설치하는 작업을 했다.
불도저로 정지 작업을 한 다음 철조망을 둘러치고 감시 망루를 설치하고 그 안에 천막을 쳤다.
이렇게 해서 거제도의 들판이 온통 천막으로 덮인 것처럼 되었다.
막사는 처음에는 이런 천막들 뿐 이었으나, 그 후 해가 지나면서 흙벽돌로 담을 쌓고 난방이 됨으로써 겨울에도 추위를 면할 수 있게 되었다.
나중에 지은 막사들은 반영구적으로 되어서 포로수용소 시설로서는 불편한 점이 없을 정도였다.
또 이곳에는 3,000개의 침대를 보유한 제64야전병원과 합계2,500개의 침대를 가지고 있는 2개의 별관 부속 병원(요양소)이 설치되었다.
또 바다를 통한 포로 및 물자의 양륙을 위해서 5개소의 LST 상륙부두가 있는 항구가 만들어졌다.

포로수용소 막사 내부:포로들은 천막으로 된 막사에서 생활했다. 포로수용소가 있던 거제도에는당시의 수용소가 재현되어 박물관으로 남아있다.

[포로수용소 막사 내부 : 포로들은 천막으로 된 막사에서 생활했다.
포로수용소가 있던 거제도에는당시의 수용소가 재현되어 박물관으로 남아있다.]

2월 초에 시작된 공사는 2월 말경에는 거의 마무리되었다.
처음에 만들어진 계획에 의하면 중앙 계곡에 있는 임시수용소에 포로를 수용하고 더 영구적인 시설을 만드는 것과 함께 동쪽 계곡을 개발하는것이었다. 그너라 포로수용소 이전의 필요성이 절박하고 포로 수송의 진도가 너무 빨라서 그 계획은 실행되지 못했다.

포로수용소 막사 내부전경, 벽면에는 항고가 가지런히 걸려있고, 침구를 정하는 포로

[포로수용소 막사 내부전경, 벽면에는 항고가 가지런히 걸려있고, 침구를 정하는 포로]

거제도포로수용소(camp)에는 하부구조로서 enclosure(`구역`이라고 하는데, 전체 수용소와 혼돈되지 않을 때는 그냥 `수용소`라고도 한다.) 와 그 하부구조인 compound(수용동)이 있었다.
거제도 전체 수용소는 60,70,80,90 단위의 숫자가 붙은 4개의 구역과 28개의 수용동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중앙 계곡엔 제6구역, 동부계곡엔 제7,8,9구역이 배치되어 있었으며, 1개 단위 구역에는 6,000명을 수용하게 되어 있었다.

포로수용소 막사 내부전경, 벽면에는 항고가 가지런히 걸려있고, 침구를 정하는 포로

[거제도 포로수용소 현황도]

나. 수용인원

공사를 하는것과 거의 동시에 부산에 있던 포로가 이곳으로 수송되기 시작하면서, 51년 2월 말에는 이미 5만여명의 포로가 옮겨졌다.
3월 1일에는 주요본부 및 부대가 거제도로 이동되었으며, 나머지 인원의 이동도 계속되어 3월 말까지 거제도로 이송된 포로의 수는 모두 약 10만명에 이르렀다.

이 기간동안에도 원주,영등포,수원,제천,대전,하양에 있는 포로수집소에서는 계속해서 부산으로 포로를 후송하였으며, 이 인원은 다시 거제도로 이송되었다. 그때까지 거제도로 수송되는 포로는 일일 약2천명 정도였다. 그리하여 5우러 말에는 11만5천여명이 이미 거제도로 수송되었고, 6월말에는 포로 이송 작업이 거의 마무리가 되면서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수용 인원수가 14만명을 넘어서게 되었다.
결국 부산에는 거제리 병원 수용소만 남고 나머지 전 포로가 거제도로 이송되었다. 물론 이후에도 전방에서 수집된 포로가 부산으로 모이고, 그 인원이 다시 거제도로 이송되는 과정은 계속되었다.

포로수송작전에 있어서 이런 속도를 훌륭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런 조급함 때문에 역대의 포로수용소장들이 비싼 대가를 지불하게 될 소지가 마련된 셈이었다. 갑자기 증가된 포로는 유엔군 측이 조직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을 넘어 설 정도가 되었다. 또한 수용소는 그 수용 가능량에 비추어 이미 만원이 되어버렸다.

부산 포로수용소에 있던 포로의 대부분이 거제도로 옮겨지게 되자, 부산의 "제1포로수용소"라는 명칭도 거제도로 넘어오게 되었다. 이로써 부산의 포로수용소는 보조적인 위치로 바뀌게 된 방면, 거제도 포로수용소는 명실상부한 최대의 포로수용소가 되었다.

고현지구에 시설된 포로수용소 전경, 고현성이 훼손된 상태로 기단부만 남아있다.

[고현지구에 시설된 포로수용소 전경, 고현성이 훼손된 상태로 기단부만 남아있다.]

포로수용소가 이전된 후로 계속되는 포로의 이송을 통해 거제도에는, 통계에 따라 다소의 차이는 있으나, 17만명에 이르는 전쟁포로들이 모이게 되었으며, 포로를 경비하는 부대병력과 행정인원등이 합쳐져서, 자체인구 약10만명의 세배 이상이나 되는 사람으로 섬이 포화 상태가 된 듯 하였다.

이렇게 해서 다음해인 1952년 포로의 분리 분산작전에 의해 이곳에 있던 대부분의 포로들을 다른 여러 수용소로 옮기게 될 때까지 1년 남짓 동안 거제도는 포로수용소의 주무대가 되었다.

부산의 수용소가 거제도로 이동함에 따라 한국군 포로 경비대대도 같이 이동했다. 한국군 당국에서는 거제도의 3개 경비대대(31,32,33대대)를 통합하기 위해 포로경비연대를 창설하고 그 본부를 거제군 고현리의 제32경비대대 내에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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