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제1차 베트남전쟁은 일본의 패망과 프랑스가 베트남에 다시 진주함으로써 시작됐다. 1946년 12월 19일 시작된 전쟁은 1954년 5월 7일 디엔 비엔푸 전투 후 종료됐다.

디엔비엔푸 전투

제2차 세계대전이 연합국(聯合國)의 승리로 끝나자, 프랑스는 갖은 수단과 방법을 다해 베트남을 일본이 진주하기 이전의 상태, 즉 자신들의 식민지 상태로 되돌리려 했다. 그러나 프랑스의 베트남 진주(進駐)는 벽에 부딪치고 말았다. 행정기관을 장악한 후 독립을 선포하고 있던 호찌민 세력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왔던 것이다. 협상에 실패한 양측은 1946년 12월 19일부로 전쟁에 돌입했다. 제1차 베트남전쟁의 시작이었다. 그 후 전쟁은 호찌민 세력이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승리할 때까지 8년 동안 계속됐다.

일본의 패망과 프랑스의 베트남 진주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終戰)이 임박한 1945년 7월 미·영·소 3국의 정상이 독일의 포츠담에서 전후처리를 위한 회담을 열었다.

그때의 회담에서 베트남 주둔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해 북위 16도선을 경계로 북부는 중국군이, 남부는 영국군이 각각 진주(進駐)하기로 결정했다. 베트남에 대한 기득권을 주장하는 프랑스의 요구는 배제됐다. 그러나 프랑스는 포기하지 않았다. 남부에 진주하는 영국군 대대에 프랑스군 1개 중대를 포함시켰다. 그리고 중국 및 영국과 협상을 통해 두 나라 군대와 교대한 후 베트남 전역을 재점령했다. 그 결과 베트남은 또 다시 프랑스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제1차 베트남전쟁의 발발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終戰)이 임박한 1945년 7월 미·영·소 3국의 정상이 독일의 포츠담에서 전후처리를 위한 회담을 열었다.

프랑스군의 진주에 따라 베트남의 독립을 주장하면서 행정기관을 장악하고 있던 호찌민 세력과 충돌은 필연적이었다. 프랑스도 강경한 입장을 고수했다. 따라서 1년 이상을 끌어온 협상은 무위로 돌아갔다. 마침내 1946년 12월 19일 호찌민군의 기습공격으로 제1차 베트남전쟁이 발발했다.

그러나 빈약한 군사력을 가진 호찌민 세력은 결코 프랑스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프랑스군은 항공기, 전차, 야포 등 당시의 최신장비로 무장된 반면, 베트남군은 소총조차도 부족해 구시대의 활과 창검(槍劍)까지 동원해야 했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반격으로 붕괴된 호찌민군은 하노이를 포기하고, 중국 국경에 인접한 산악지대로 피신해 장기적인 저항에 돌입했다.

그러나 전투가 거듭되면서 명분 없는 전쟁에 돌입한 프랑스군은 점차 호찌민군의 치고 빠지는(Hit & Run) 방식의 게릴라전에 말려들게 되면서 불리한 상황으로 역전되기 시작했다. 상황이 점점 더 불리하게 바뀌면서 프랑스도 군사적 승리가 어렵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됐다. 프랑스는 다시 한 번 정치적 해결을 모색했다. 프랑스가 고안한 방안은 호찌민과 대항할 수 있는 새로운 정부를 수립해 호찌민과 싸우도록 하고, 프랑스는 그들을 지원한다는 것이었다. 프랑스는 호찌민에게 권력을 물려주었던 응웬 왕조의 마지막 황제 바오다이(Bao Dai)를 내세웠다. 바오다이와 끈질긴 협상 끝에 1949년 3월 바오다이를 수반으로 하는 통일정부를 수립하게 했다. 한편 미국은 프랑스의 베트남 지배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1949년 10월 중국의 공산화에 이어 1950년 6월 한반도에서 6·25전쟁이 발발하자, 공산주의 팽창의 도미노(domino) 현상을 우려했다. 이에 따라 미국은 6·25전쟁에 즉각 참전하는 한편 호찌민군과 전투중인 프랑스군에게 군사원조를 제공하며, 동남아시아에서 공산주의 팽창을 저지하도록 했다. 이에 앞서 1950년 1월 18일 마오쩌둥(毛澤東)의 중국 정부가 호찌민 정부를 승인했으며, 그해 1월 30일 소련의 승인이 이어졌다.

그때부터 제1차 베트남전쟁은 중국과 소련이 지원하는 호찌민군과 미국 등 자유진영이 지원하는 프랑스군이 대결하는 양 진영 간의 전쟁으로 바뀌게 됐다.

디엔비엔푸 전투와 제네바 평화협정

디엔비엔푸 위치도
디엔비엔푸 위치도

베트남전쟁을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체제가 대결하는 이념전쟁으로 바꾸려는 프랑스의 노력은 벽에 부딪치고 말았다. 대부분의 베트남 사람들이 바오다이 정부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많은 베트남 사람들은 바오다이가 일본에 이어 프랑스의 꼭두각시가 된 것으로 간주했다. 따라서 바오다이 체제는 결코 호찌민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프랑스는 미국의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어 병력을 증파하면서 호찌민과 대결했지만, 시간은 베트남 주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호찌민 편이었다. 프랑스군 지휘관 나바르 장군은 당시 프랑스군 대부분이 주요지역과 시설경계를 위해 배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기동예비전력이 없었다.

따라서 각 지역에 분산되어 있는 프랑스군을 기동 예비로 보유하기 위해 서북부 라오스와 국경지역에 위치한 디엔비엔푸에 거점을 확보해 하노이 삼각주와 서북부를 연결하는 축을 마련 후 두 개의 방향에서 각개격파한다는 전략을 수립했다.이를 위해 1953년 11월 20일, 디엔비엔푸에 비행장을 구축하고 병력을 16,200여 명으로 증강했다. 이에 대해 호치민은 3개월 여 동안 3개 사단 규모의 병력과 야포 등을 은밀히 이동시켜 1954년 3월 13일 야간에 총공격을 개시하여 55일 간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했다.

프랑스군 병력현황 공훈록 정보
프랑스군 미국 및 세계
소계 프랑스인 아프리카 외인부대 해군 공군 소계 정규군 지방군
387,000 137,000 54,000 48,000 20,000 5,000 10,000 250,000 50,000 200,000

프랑스군 병력현황(1953년 11월말 기준)

디엔비엔푸 상황도(1954.3.13~5.17)
디엔비엔푸 상황도(1954.3.13~5.17)

호치민군은 공격 6일 만에 외곽 거점인 가브리엘, 베아트리서, 이사벨을 점령했다. 이어 2단계 총공세를 실시하여 내곽의 12개 거점(점선내의 ★ 표시)을 점령함으로서 프랑스군은 막대한 손실을 입고 항복하게 되었다. 1954년 5월 7일 디엔비엔푸(Dien Bien Phu)[1] 요새가 호찌민군에게 함락되자, 프랑스는 더 이상 전쟁을 계속할 명분을 잃었다. 이에 따라 프랑스는 1954년 7월 20일 제네바에서 호찌민 세력과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협정의 내용은 북위 17도선을 경계로 북쪽은 호찌민 세력이 점령하고, 남쪽은 프랑스가 세운 바오다이 체제를 유지하되, 2년 후인 1956년 7월 까지 남·북 총선거를 실시해 통일정부를 구성한다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제네바 평화협정은 프랑스군의 항복과 같은 형식이었으며, 제1차 베트남전쟁은 호찌민 세력의 승리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2]

※ 제1차 베트남전쟁에 대해 더 알고 싶으면?

  • ⓛ 최용호,「지평리 및 디엔비엔푸 전투의 승패요인 비교 분석」,『군사연구』제119호, 육군본부 군사연구소, 2003
  • ② 최용호, 『한권으로 읽는 베트남전쟁과 한국군』,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4, pp. 59∼70
  • ③ George C. Herrring, America's Longest War, fourth ed. 2002, pp.33-45
  • ④ 6·25전쟁에 참전했던 프랑스군에 관해서는 에드완 베르고 저·김병일·이해방 공역,『6·25전란의 프랑스대 대』,동아일보사, 1983 참조[3]
  • ⑤ 디엔비엔푸 전투에 관해서는 에르완 베르고(Erwan Bergot) 의『디엔비엔푸에서의 170일(Cent soixante-die jours de Bien Bien Phu(1979)』을 참조 : 프랑스아케데미 상 수상
  • ⑥ 디엔비엔푸 전투외 베트남 중부지역인 19번 도로를 연하여 프랑스군 제100기동전 투단의 전투에 관해서는 최용호,「월남전에서의 프랑스 제100기동전투단의 최 후」, 『전사』제13호,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1987. 11, pp. 74∼96 참조

* 제100기동전투단의 편제 부대 중 6·25전쟁에 참전했던 대대가 모체가 되 어 ‘한국대대’라는 명칭으로 전투를 수행했다.

  • [1] 디엔비엔푸는 하노이에서 서쪽으로 300km, 라오스 국경으로부터 16km 이격된 지역으로 조그만 촌락이었으나, 베트남 서북부와 라오스를 연결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 [2] 디엔비엔푸 전투에 참전했던 대대 중 6?25전쟁시 1951년 2월 13일부터 15일까지 지평리 전투에 참전했던 몽클라르 대대장이 있었다.(프랑스군 계급은중장이었으나 전쟁 참가시 중령 계급으로 참전)
  • [3] 프랑스군 대대는 6·25전쟁 당시 유엔 프랑스군으로서, 미 제2사단 예하 보병 제23연대와 TF로 임무 수행했다. 유엔 프랑스군 사령관은 육군 중령(제2차 세계대전 참전, 대장) 몽끌라르(마그랭-베네르)였으며, 참모부와 1개 대대로 구성되었다. 프랑스군 대대는 1953년 10월 22일, s/s 제너럴 블레이크호를 타고 인도차이나로 향발, 한국에는 깔대루 중위의 지휘하에 상징적인 분견대만 잔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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