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제1차 베트남전쟁은 일본의 패망과 프랑스가 베트남에 다시 진주함으로써 시작됐다. 1946년 12월 19일 시작된 전쟁은 1954년 5월 7일 디엔 비엔푸 전투 후 종료됐다.

남베트남 정부의 혼란

1955년부터 디엠 정부의 독재는 베트공과 북베트남의 개입으로 사회 혼란은 더욱가중되었다.

1960년 11월, 사회의 불만이 점점 높아지는 가운데, 지엠에 반대하는 군부 쿠데타가 발생했다. 쿠데타는 곧 진압됐지만, 지엠은 측근들에 의한 독재정치를 더욱 강화하면서 반대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에 나섰다.

남베트남에 대한 미국의 지원도 확대되기 시작했다.

1950년 10월 10일, 프랑스를 지원하기 위해 베트남에 파병됐던 미 군사고문단(MAAG)은 제네바 협정이 체결되면서부터 프랑스군을 대신해 남베트남군의 편성과 훈련을 담당했다. 이어서 1957년에는 소수의 특수부대가 파병되었으며, 1962년 2월 8일에는 본격적인 군사개입을 의미하는 군사원조사령부(MAC-V)가 설치되었다.

북베트남의 군사적 개입

남베트남에 대한 미국과 하노이 정부의 지원이 경쟁적으로 확대되면서 남베트남 상황은 전쟁과 유사한 수준으로 확대되기 시작했다.

그에 앞서 지엠 정부의 족벌 독재정치와 관리들의 부패, 그리고 주민들의 의사를 무시하는 각종 정책에 대한 반대시위로 사회혼란과 민심이반 현상이 극에 달했다. 그 결과 지엠 일족(一族)은 1963년 11월 1일 발생한 쿠데타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던 지엠 정권이 무너진 남베트남 정국은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에 빠져들었다.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쿠데타와 정권교체로 국민들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정권의 핵심부는 나라의 안보는 미국에 맡긴 채 정권탈취와 권력기반 강화에 혈안이 되었다. 이러한 혼란을 노려 1963년 12월이 되면서 하노이 정부는 정규군의 남파와 미군에 대한 직접 공격을 결의했다.

하노이 정부의 내부적인 선전포고인 셈이었다. 그때쯤 미국 정부도 ‘베트남전쟁의 미국화’로 베트남 사태를 미국이 직접 떠안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1964년 5월 9일에는 한국을 비롯한 자유우방 25개국에 존슨 대통령의 서한을 보내 남베트남 지원을 요청했다. 이어서 같은 해 8월 4일에는 미국정부가 “통킹만 공해상에 정박한 미군 함정이 북베트남 어뢰정의 공격을 받았다.”며, 소위 ‘통킹만사건’을 발표하면서 북베트남 항구시설을 폭격했다. 이로써 전쟁은 미국과 북베트남의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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