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미국은 베트남 상화의 악화에 따라 점진적으로 전투 병력을 증강하였다, 즉 베트남 전쟁의 미국화 추진으로 베트남전쟁에 개입하였다.

제2차 베트남전쟁과 한국군 파병 배경

국제정치적 관점에서 볼 때 베트남전쟁과 6·25전쟁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된 전쟁이었다. 1946년 12월 제1차 베트남전쟁이 발발하면서 점차 미·소간 냉전의 고리가 들어나기 시작했고, 그 것이 6·25전쟁 발발에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미국이 베트남전쟁에 개입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도 6·25전쟁이 제공했다. 그 후 1964년 9월부터 시작된 한국군의 베트남파병은 건군 이후 최초의 해외파병이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의 현대사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대한민국의 위상을 국제정치무대에 새롭게 각인시키는 계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내부적으로도 국군의 현대화와 안보태세 발전은 물론 경제적인 측면에 이르기까지 그 영향은 지대했다.

1950년대 미국의 동아시아전략

1950년 1월 12일, 애치슨(Dean G. Acheson) 국무장관이 전국 기자클럽(National Press Club) 연설에서 “미국의 극동방위선은 알류산열도-일본본토-오키나와-필리핀을 연결하는 선이다.”라고 밝혔다. 소위 ‘애치슨라인’ 또는 ‘애치슨선언’으로 알려진 미국의 동아시아 방위전략이었다.

당시 아시아에 대한 미국의 관심은 온통 일본에 집중되어 있었다. 자신들의 내해(內海)로 간주하고 있던 태평양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일본열도가 무엇보다 중요했기 때문이다.

미국의 입장에서 본다면 한반도, 타이완, 베트남 등은 일본에 비해 전략적 가치가 떨어지는 지역이었다. 그러나 그 같은 미국의 입장은 ‘애치슨선언’ 이후 6개월도 지나지 않아 급변하게 되었다.

1950년 6월 25일, 한반도에서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전쟁이 발발하자 소련이 미국의 반응을 시험해 보고 있는 것으로 판단한 트루먼 대통령이 즉각 참전을 결정했기 때문이다. 아울러 베트남에서 공산주의 세력과 힘겨운 전쟁을 계속하고 있던 프랑스를 적극 지원하는 한편, 제7함대를 타이완해협에 파견해 중국의 위협으로 일촉즉발의 위기에 처한 타이완을 보호하기로 했다.

미국의 베트남전쟁 개입 배경

한반도에서 발생한 6·25전쟁은 동아시아지역 분쟁의 개입에 소극적이었던 미국의 전략을 단숨에 뒤집는 계기가 되었다.

주저함 없이 6·25전쟁에 참전한 미국은 한반도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까지 개입 범위를 확대해 베트남에서 호찌민 세력에게 밀리고 있던 프랑스를 적극 지원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6월 30일 군수물자를 적재한 항공기를 베트남에 보낸데 이어 군사원조단을 파견하기 시작했다.

1954년 2월에는 중장이 지휘하는 700여 명으로 원조단을 확대했다. 그러나 프랑스는 그해 5월 7일 베트남 북부 산악지대의 디엔비엔푸(Dien Bien Phu)전투에서 패배하면서 베트남에서 철수를 결정했다.

그때부터 미국은 동남아시아에서 공산주의 세력에 대항하는 힘의 공백을 자신들이 직접 담당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의 전략은 남·북으로 분할된 베트남의 남부에 친미(親美)정부를 수립해 동남아시아에서 공산주의 세력에 대항하는 기지로 활용하는 것이었다.

이 같은 미국의 전략에 따라 1955년 10월 26일 ‘응오딘지엠(Ngo Dinh Diem)’을 대통령으로 하는 베트남공화국(the Republic of Vietnam)이 출범했다.

지엠(Diem)의 건국 이후 남베트남은 한 동안 안정을 찾아가는 듯 했다. 그러나 지엠 일족에 의한 족벌독재정치가 계속되면서 지엠정권에 반대하는 베트콩(Viet Nam communist) 세력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럴수록 미국의 남베트남 지원은 더욱 확대되었다.

1961년 말 3천2백여 명 규모였던 군사원조단이 1962년 말에는 대장이 지휘하는 군사원조사령부로 확대되면서 1만2천여 명 규모가 되었다.

1964년이 되자 북베트남 공산주의자들의 남파가 더욱 증대되기 시작하면서 그 동안 자제해왔던 미군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그때부터 양측은 전쟁을 피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이승만·박정희 정부의 한국군 파병 제안과 미국의 반응

6·25전쟁이 휴전으로 포성을 멈추게 되자, 이승만 대통령은 공산주의 세력이 확산되고 있는 라오스, 베트남, 인도네시아 등에 한국군을 파병하겠다는 의지를 수차례 미국에 제안했다. 그러나 당시 미국은 동남아시아 개입전략을 구체화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대통령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후 1961년 5·16으로 집권한 군사정부는 한국군 파병에 더욱 적극적이었다. 군사정부의 당면과제는 미국과 안보동맹체제를 강화해 북한의 위협에 대처하는 것과 원조를 최대로 얻어내 자립경제의 기반을 구축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군사정부는 한·일국교정상화와 베트남파병을 국가전략으로 채택해 안보와 경제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동시에 잡으려 했다. 이 같은 전략에 따라 1963년 11월 미국을 방문한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은 케네디 대통령과 첫 번째 만남에서 한국군의 파병을 공식 제안했다. 그 후에도 박정희 정부의 제안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그때 마다 그럴 듯한 이유를 들어 한국의 제안을 완곡하게 거절했다.

한국군 파병에 부정적이었던 미국의 입장이 바뀌게 된 것은 날로 증대 되고 있는 베트콩 세력을 방치할 경우 남베트남 정부의 존립이 위태롭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존슨 대통령은 1964년 5월 9일, 한국을 포함한 25개 우방국가에게 서한을 보내 남베트남을 도와 줄 것을 요청했다. 박정희 정부가 오랫동안 공을 들여왔던 해외파병이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케네디와 박정희
케네디와 박정희
케네디와 미국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마친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이 기념사진을 찍었다.(1961.11.14)

응오딘지엠과 아이젠하워
응오딘지엠과 아이젠하워
미국을 방문한 지엠 남베트남 대통령을 접견하는 아이젠 하워

제1이동외과병원 창설식
제1이동외과병원 창설식
건군 이래 최초의 해외파병부대 창설이었다. (1964.7.15. 서울 창동)

건군 이후 최초의 해외파병

에치슨 국무부장관이 발표한 미국의 극동방위선
에치슨 국무부장관이 발표한 미국의 극동방위선

존슨의 서한을 계기로 한국군 파병은 급물결을 타기 시작했다. 그러나 또 하나의 장애물이 있었다. 당사국인 남베트남 정부의 공식요청이 지연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중국으로부터 1천여 년, 프랑스로부터 거의 1백여 년 동안 식민지배를 받았던 경험 때문에 외국 군대에 대한 거부감이 남달랐다.

우여곡절 끝에 1964년 7월 15일 남베트남의 파병요청 서한을 접수한 정부는 7월 23일 파병동의안을 국회에 상정해 31일 본회의에서 만장일치의 동의를 받았다.

한편 7월 15일 최초의 파병부대로 제1이동외과병원을 창설한 정부는 8월 16일 선발대를 현지에 파견했다. 이어 9월 11일 태권도교관단 10명을 포함한 140명 규모의 한국군의료지원단이 부산항 제3부두를 출항해 22일 사이공에 상륙했다. 1973년 3월 23일까지 8년 6개월간 계속된 베트남파병의 시작이었다.

※ 한국군의 파병 배경에 대해 더 알고 싶으면?

ⓛ 최용호, 『한권으로 읽는 베트남전쟁과 한국군』,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4, pp. 127∼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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