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미국은 베트남 상화의 악화에 따라 점진적으로 전투 병력을 증강하였다, 즉 베트남 전쟁의 미국화 추진으로 베트남전쟁에 개입하였다.

제2차 베트남전쟁의 베트남화(1968. 4. 1~1973. 1. 21)

1968년 1월 30일과 31일의 구정공세는 미국의 전쟁 정책을 전환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으며, 3월 31일 북폭 중지와 함께 종전을 위한 평화협상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1968년 4월 1일 이후

1968년 민족해방전선의 구정공세가 있은 후 당시 주월 미 군사지원사령관이던 William Westmoreland 장군은 미국 육군참모총장으로 전임되고 후임으로 Creighton W. Abrams 장군이 부임했다. 최근 공세와 “A Shau Balley" 에서의 작전에서 민족해방전선이 입은 막대한 손실과 미군의 전과확대를 위해, 또한 남베트남군의 전투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Abrams 장군은 남베트남군에게 현대식 무기와 장비의 보급을 포함하는 베트남화(Vietnamization) 계획을 착수했는데 이로써 미국은 남베트남군에게 남베트남의 방어에 대한 큰 전투부담을 이양하려는 것이었다.

1969년

1969년에 이르러, 남베트남에 주둔한 미군은 동낑 만의 해군 제7함대와 괌과 태국의 기지로부터 날아온 전략공군의 지원을 받는 543,482명이나 되는 막대한 병력으로 증강했다. 항구, 도로, 비행장, 숙영지, 창고 등이 백만 이상 병력의 보급소요를 중당하기 위해 생겨났다.

다른 동남아 조약기구(SEATO) 국가들이 미국-남베트남동맹에 가담했으며 남베트남에서 동맹군의 수가 최대로 이르렀을 때는 한국, 호주, 뉴질랜드, 태국, 필리핀에서 제공된 병력은 총 62,000명이었으며 8,500명의 사상자를 냈다. 또한 비전투 부대가 서부 독일, 대만, 말레이지아에서 왔으며 미국은 파월된 모든 동맹국 군에 대한 군수지원을 제공했다. 이와 동시에 남베트남에서 거대한 암시장이 형성되고 남베트남인들은 일부 부패한 미군과 짜고 미군의 식료품·탄약·PX 물품 등을 몰래 훔쳐 냈다. 마약거래가 성행했고, 홍등가가 번창했으며 1972년 상병 보균율이 최고 일 때는 1,000명 중 약 700명이 보균자였다. 미국인들의 전쟁에 대한 환멸은 커 갔지만 전쟁은 여전히 질질 끌었다.

1970년 이후

전쟁을 단축시키고 캄보디아에 있는 민족해방전선의 거대한 보급 기지를 파괴하기 위하여 닉슨 대통령은 미군에게 남베트남군이 수행하는 작전과 맞추어 1970년 4월 30일 캄보디아의 “앵무새 부리(Parrot's Beak)"와 ”낚시 바늘(Fish Hook)"지역으로 진격하라고 명령했다. 비록 2개월에 걸친 공격으로 많은 양의 장비를 포획했었지만, 보급품은 여전히 라오스를 연하는 호치민 루트를 경유해서 남베트남에 있는 민족해방전선에게 유입되었다. 캄보디아에 대한 침공의 결과로 미국내에서는 반전운동이 불꽃처럼 치솟아 올랐다.

미국 정부는 남베트남전쟁이 이미 인도지나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캄보디아도 이 전쟁에 개입되었기 때문에 이번 작전은 그 일부라고 변명하며 이 침공을 정당화하려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징병초기, 많은 사람들이 이에 응하지 않았으며 뒤따라 수 만명의 젊은이들이 징병을 기피하며 모병을 반대하였고 많은 사람들이 현역복무에서 이탈하였다. 이러한 자들은 스웨덴이나 캐나다로 도피했으며 미국내 지하로 숨거나 아니면 체포되어 유치장으로 끌려갔다. 반전 시위 행진, 집회단체의 규모나 범위가 커져서 점차 미국사회의 각계 각층을 그들의 대열에 끌어 들였으며 그들 중에는 진정한 애국자로부터 국제 공산주의자들의 선전이 차라리 옳다고 생각되는 자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였다. 한편 미국 전쟁 포로들은 미국에서 잊혀 진 채 적지에서 지옥같은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민족해방전선들은 그들의 숫자, 신분, 심지어 건강 등 상세한 내용을 알리기를 거부하였기 때문에 파리에서의 평화회담에서는 아무런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비록 1972년까지 Abrams 장군의 미군 그리고 남베트남군은 실제적으로 남베트남의 지상전에서 승리하여 민족해방전선이나 북베트남의 전력을 현저히 감소시키고 민족해방전선에게 말할 수 없이 많은 사상자를 내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여론은 한결 같이 거의 모두가 남베트남전에 대한 미국의 개입이 비극적인 과오라고 생각하였다. 1969년부터 시작한 대통령 보좌관인 헨리 키신저와 Le Duc Tho 와의 비밀회담을 통하여 1973년 1월 27일에 미국포로를 석방하고, 남베트남으로부터 모든 미군이 철수한다는 평화협정이 조인되었다.

이리하여 1973년 3월 29일에 마지막 미군이 남베트남을 떠나게 되었다.

※ ‘베트남전쟁의 베트남화’에 대해 더 알고 싶으면?

  • ⓛ 유제현, 『월남전쟁』, 한원, 1992, pp. 331∼352
  • ② 최용호, 『한권으로 읽는 베트남전쟁과 한국군』,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4, pp. 107∼109
  • ③ 베트남 인민군대출판사·이미선 역, 『항미전쟁의 종결』, 국방부 군사편찬연 구소, 2009, pp. 63∼78
  • ④ George C. Herrring, 'The Easter Offensive' America's Longest War, fourth ed. 2002, pp. 304∼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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