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병태(李秉泰)

  • 군별 : 육군
  • 계급 : 하사
  • 군번 : K1131550
  • 전몰일자 : 19510815

공훈사항

이병태 하사는 1924년 3월 15일 경상남도 김해군 대동면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북한군의 기습남침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1950년 9월 21일 육군에 입대하여 미 지상군지원 한국군(KATUSA)으로 차출되어 근무하다가 국군 수도사단 제1연대에 배치되었다.
이병태 하사가 전선에 배치될 당시 원산까지 진격했던 국군과 유엔군이 후퇴를 시작하게 되자 함경도 지방의 많은 주민들이 피난길에 올랐다. 1950년 12월 9일을 전후하여 성진, 함흥, 흥남, 원산 등의 항구에는 피난민들로 큰 혼잡을 빚었다. 이 하사와 연대병력은 수송 수단이 허용하는 대로 가능한 많은 피난민을 후송하기 위해 노력하던 중 길주에서 북한군이 반격해 오자, 그를 비롯한 장병들은 12월 14일 함흥과 흥남으로 철수하였다.
이병태 하사와 장병들은 중공군의 제3차 공세를 맞아 1951년 1월 3일 양양 남쪽에 있는 원포리 일대에 진지를 점령하였다. 이후 강릉에 방어진지를 강화하면서 2월 25일부터 북한군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속사리 부근으로 투입되었다. 그와 장병들은 3월 9일 속사리 일대 적 지역을 위력 수색해 북한군을 멀리 구축하였고 3월 26일 제2차로 38도선을 돌파한 후 계속 진격하여 4월 15일에는 캔자스선의 동단 남가리로 진출하였다. 5월 6일 중공군 제6차 공세가 시작되어 설악산 부근의 연대 주저항선이 돌파되면서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6월 3일 오후 3시에 북한군 1개 중대규모가 선제 기습공격으로 이 하사와 연대병력이 방어하고 있던 칠절봉 부근 주저항선 돌파를 기도하였으나 격퇴되었다. 이어 9일과 10일에도 북한군의 공격은 향로봉 부근으로 계속되었다. 12일을 기하여 열흘 동안의 격전을 일단락 짓고 향로봉은 물론 북한군 거점이었던 산두곡산과 향로봉 서쪽의 940고지마저 수중에 넣었다.
하나의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무수한 인명이 희생되는 소모전이 계속되었다. 생사의 기로에서 최후까지 용감하게 싸웠던 이병태 하사는 1951년 8월 15일 향로봉 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하였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병태 하사의 혁혁한 전공을 기리기 위해 화랑무공훈장(훈기번호 111808 육)을 추서하고 위패(23판-14면-8757호)를 국립대전현충원에 모셔 살신보국정신을 기리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명비(005-ㄲ-031)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