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병학(李秉學)

  • 군별 : 경찰
  • 계급 : 순경
  • 군번 :
  • 전몰일자 : 19520501

공훈사항

이병학 순경은 1929년 6월 23일 전남 곡성군 죽곡면에서 출생했다. (경찰 입문 일자 미상). 그는 전몰 당시 전남도경 곡성경찰서 소속으로 재직 중 곡성에서 전사했다.
1950년 6월 28일 서울이 함락되고 군경부대가 남쪽으로 후퇴함에 따라 곡성경찰은 곡성-광주, 곡성-구례를 잇는 군 주보급로 경비, 주요 시설 경비, 오열 색출 임무를 수행했다. 한강방어선을 돌파한 북한군이 계속 남진하자 전남경찰국은 각 서(署)에서 일부 병력을 차출하여 전북경찰국에 배속하고, 나머지 병력으로 전투부대를 편성했으며, 곡성경찰서 병력도 전투경찰로 재편되었다.
북한군이 계속 남진하자 전남경찰국은 각 서(署)에서 15명씩을 차출하여 전북경찰국에 배속하고, 나머지 병력으로 전남전투경찰부대를 편성했다. 곡성경찰서 병력도 전투경찰로 재편되었다. 북한군 제6사단이 호남지역에 투입되어 7월 16일 금강을 도하하여 곡성-전주로 남진했다. 이에 육군본부는 7월 17일 서해안지구 전투사령부를 설치하고, 전북·전남 편성관구사령부와 신편 제7·제5사단, 경찰 등을 배속하여 지역방어임무를 수행하도록 했다.
곡성경찰은 적의 공격을 최대한 저지하기 위해 7월 29일 오전 8시에 곡성경찰서장 지휘하에 곡성을 철수하여 섬진강과 보성강이 합류하는 압록에서 저지선을 형성했다. 이때 북한군 제6사단 선두부대인 제606기계화부대가 남원에서 남진하고 있었다. 오전 11시 30분 적의 정찰기동대가 사이드카를 앞세우고 3개 중대병력이 아군 전방에 도달했다. 곡성경찰은 일제히 적을 공격하여 교전 3시간 만에 적 25명을 사살하고 사이드카 5대를 격파했다. 북한군은 후퇴하였다가 다음 날 대병력으로 곡성경찰의 방어진지를 포위 공격했다. 곡성경찰병력 400명은 5시간 동안 적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다가 병력과 화력의 열세로 인하여 곡성군 죽곡면으로 후퇴, 백운산으로 잠입했다. 이후 곡성경찰은 백운산을 근거지로 하여 적을 상대로 유격전을 전개하며 적에게 심대한 타격을 가했다. 6·25전쟁 발발 이후 1개 경찰서부대가 유격전을 전개하며 북한군에게 심대한 타격을 준 것은 곡성경찰서가 유일하다.
그 후 곡성경찰은 태전사(태백산지구전투사령부) 부대에 편성되어 제1기(1951.10.02. -12.14), 제2기(1951.12.16.-1952.01.04.), 제3기(1952.01.04.-01.31.) 공비토벌작전에 참가하여 많은 공을 세웠다. 1952년 5월 1일 곡성에서 잔적소탕작전을 수행하던 이 순경은 적을 격멸하기 위해 용감하게 싸우다가 적의 총탄에 의해 장렬하게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병학 순경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전쟁기념관 전사자 명비(100-ㅎ-024)에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