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병호(이병호)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K1123952
  • 전몰일자 : 19511103

공훈사항

이병호 일병은 1923년 8월 27일에 경상남도 밀양군 내양수용소에서 출생했다. 그는 6·25전쟁 당시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방어선에서 북한군의 총공세를 격퇴하던 1950년 9월 8일, 경남 부산의 육군 제2훈련소로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에 카투사(KATUSA)로 차출되어 미 제24사단으로 배치되었다.
이병호 일병이 부대로 전입했던 10월 하순, 미 제24사단은 청천강 일대에서 유엔군의 2차 총공세를 준비하고 있었다. 사단은 11월 24일에 청천강을 도하하여 2차 총공셍에 참가하여 평안북도 선천까지 진격했으나, 이번에도 중공군의 공격으로 후방차단될 우려가 있어 철수했다. 이후 12월 6일에 평양방어선에서 철수하여 12월 13일에는 38도선 상의 김화-포천-의정부 축선에 배치되었다.
중공군은 12월 31일 야간에 주공을 서울로 향해 총공세를 개시했다. 이에 미 제24사단은 중공군의 공격에 지연전으로 철수했다. 이후 1951년 1월 4일에 의정부에서 서울을 거쳐 장호원 일대로 철수했다가 2월 초에 양평 서측의 양자산(704고지)에 방어진지를 편성했다. 이곳에서 중공군의 2월 공세를 격퇴하고 차후 작전을 준비했다.
이병호 일병이 소속된 미 제24사단은 3월 7일부터 반격작전으로 진격하여 3월 31일에 가평을 탈환했다. 계속 공격하여 4월 9일에 화천-광덕산을 연하는 선(일명 캔자스선)에 도달했다. 그러나 4월 22일부터 시작된 중공군의 4월 공세와 5월 16일부터 시작된 중공군의 5월 공세로 가평 남쪽의 북한강 동쪽까지 철수했다. 이후 유엔군이 5월 24일부터 대대적인 반격작전을 개시할 때, 사단 장병들은 가평에서 시작하여 5월 31일에는 화천호를 탈환하고, 군단의 예비가 되어 사창리 부근에 집결했다. 반면 미 제9군단은 계속 공격하여 6월 15일까지 적근산까지 진출했다. 이후 휴전협상이 진행되면서 전선은 소강상태가 계속되었고, 사단 장병들은 진지보강과 교육훈련, 그리고 수색작전에 집중했다. 그가 소속된 소대는 11월 3일에 수색작전을 하다가 적 침투조를 발견하여 치열한 전투 끝에 격멸했다. 이날 그는 미군 장병들과 함께 용감하게 싸우던 중 적의 총탄에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병호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33판-40면-21974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128-ㅍ-033)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