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병회(李炳繪)

  • 군별 : 경찰
  • 계급 : 경사
  • 군번 :
  • 전몰일자 : 19510412

공훈사항

이병회 경사는 1921년 10월 1일 전남 광양군 옥용면에서 출생했다. 그는 1949년 9월 8일 경찰에 입문했으며, 전몰 당시 전남도경 나주경찰서 소속으로 재직 중 다도에서 전사했다.
제주 4·3사건(1948년)과 이듬해 여·순 사건으로 인하여 안보적으로 매우 어수선한 상황에서 지방공비 세력이 증가하자 정부는 군·경 합동으로 대대적인 공비토벌작전을 단행하기로 했다. 이 경사는 3단계(제1단계: 1949.10.30-11.30, 제2단계: 12.1-12.15, 제3단계: 1949.12.16-1950.2.28.) 토벌작전에 참가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여 6월 28일 서울이 함락되고 군경부대가 남쪽으로 후퇴함에 따라 나주경찰은 나주-함평, 나주-광주를 잇는 주요 도로 통제, 주요 시설 경비, 피난민 이동 통제·구호 임무에 들어갔다.
북한군 제6사단이 7월 16일 금강을 도하하여 곡성-전주로 남진하자 육군본부는 7월 17일 서해안지구 전투사령부를 설치하고, 전북·전남 편성관구사령부와 신편 제7사단·제5사단, 경찰 등을 배속하여 지역방어임무를 수행하도록 했다.
북한군은 7월 18일 강경을 점령한 후 이어서 7월 20일 곡성을 점령했고, 그 중 일부 부대는 김제로, 일부는 전주로 남진함에 따라 전북도경은 이날 남원으로 철수했다. 7월 20일 전주가 적의 수중에 들어가자 남원에 집결한 전북도경과 전북 북부지역 경찰은 임실 방면에서 남진하는 북한군에 대비하기 위해 육군부대와 합동 방어태세를 갖추고, 운봉에 진출한 함양경찰 병력과 합세하여 육십령 고개에 차단진지를 구축했다.
북한군의 남진에 따라 7월 20일 전남도경이 보성으로 철수했고, 전남도경이 철수함에 따라 나주경찰의 일부도 보성 일대로 철수했으나 이 경사가 포함된 일부 병력은 나주에 남아서 광주와 장성 방면에서 남진하는 북한군의 이동상황을 파악하며 타격을 가했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적으로 수행되고 국군과 유엔군이 9월 16일 총반격작전을 개시하자 각 도(道) 경찰국은 관할지역 경찰관서를 수복하기 위한 작전에 돌입했다. 9월 23일 나주경찰서를 수복한 나주경찰은 잔적 소탕과 치안 유지에 들어갔다.
인천상륙작전과 국군·유엔군의 총반격 작전으로 인하여 퇴로가 차단된 북한군 잔적은 가까운 산지로 들어가 공비들과 합류하여 게릴라 활동을 전개했다. 1951년 4월 12일 다도면에 공비들이 출현하여 양민학살과 식량·가축을 약탈하는 일이 발생하여 나주경찰이 출동했다. 이 경사는 휘하의 병력을 지휘하여 공비들을 소탕하다가 적이 쏜 총탄에 맞아 장렬하게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병회 경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전쟁기념관 전사자 명비(099-ㅇ-080)에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