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병후(李炳侯)

  • 군별 : 경찰
  • 계급 : 순경
  • 군번 :
  • 전몰일자 : 19510810

공훈사항

이병후 순경은 1924년 2월 20일 전남 거창군 마리면에서 출생했다. 그는 1948년 6월 4일 경찰에 입문했으며, 전몰 당시 전남도경 담양경찰서 소속으로 재직 중 담양에서 전사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경찰 비상경비총사령부는 각 도(道) 경찰국이 즉각 전투태세로 전환하도록 지시하고, 군경 합동작전태세에 돌입했다.
1950년 6월 28일 서울이 함락되고 군경부대가 남쪽으로 후퇴함에 따라 담양경찰은 정읍-담양, 고창-담양, 담양-순창을 잇는 주요 도로 통제, 주요 시설 경비, 피난민 이동 통제·구호 임무를 수행했다. 한강방어선을 돌파한 북한군이 계속 남진하자 전남경찰국은 각 서(署)에서 일부 병력을 차출하여 전북경찰국에 배속하고, 나머지 병력으로 전남전투경찰부대를 편성하였으며, 담양경찰서 병력도 전투경찰로 재편되었다.
7월 22일 북한군이 장성과 담양을 거쳐 7월 23일 광주로 진격했다. 아군 군경부대는 적의 공격을 저지하다가 병력과 화력의 열세로 후퇴했으며, 담양경찰은 화순-순천을 거쳐 하동으로 기동했다. 비상경비총사령부는 7월 31일 진주에서 경남경찰, 전남·전북경찰 혼성병력 4천여 명으로 전투부대를 재편성했고, 경찰부대는 미 제25사단 및 한국 해병대와 합동작전을 전개했다. 8월부터 9월까지 이 순경이 소속된 경찰부대는 고성·창원·함안·진동에서 북한군 제6·7사단과 치열한 전투를 하면서 낙동강 방어선을 지키는데 크게 기여했다.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과 국군·유엔군의 반격작전이 개시되자 각 도(道) 경찰도 경찰관서 수복작전에 나섰다. 담양경찰은 10월 15일 담양경찰서를 수복하고 지역 내 치안유지와 잔적소탕작전을 전개했다. 국군·유엔군의 총반격으로 퇴로가 차단된 북한군은 가까운 산지로 들어가 공비들과 합류하여 게릴라 활동을 전개했다. 이에 치안국 비상경비총사령부는 3차(1차 1951.3.10-4.10, 2차 1951.4.15.-5.5, 3차 1951.7.15-8.15)에 걸쳐 공비섬멸 작전기간을 선정하였으며, 이 순경은 제1-제2차 공비섬멸작전에 참가하여 많은 공을 세웠다.
그 후 이 순경은 7월15일부터 제3차 공비섬멸작전에 참가하여 많은 공을 세웠으며, 8월 10일 담양에 출현한 공비들을 격멸하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용감하게 싸우다가 적의 총탄에 맞아 장렬하게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병후 순경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전쟁기념관 전사자 명비(099-ㄷ-092)에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