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병희(李炳熙)

  • 군별 : 육군
  • 계급 : 이병
  • 군번 : 9712107
  • 전몰일자 : 19511128

공훈사항

이병희 이병은 경상북도 대구시 원대동에서 출생했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6·25전쟁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1950년 7월 중순경 제2교육대에 입대했다. 이 이병은 기초군사훈련을 받고, 8월 20일 제7사단 예하부대로 창설된 제8연대에 배치되었다.
연대는 8월 하순부터 신녕전투와 영천전투에 투입되어 혈전 끝에 적을 격퇴함으로써 낙동강방어선에서의 최대 위기를 극복하고 반격의 발판을 마련했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함에 따라 연대는 추격작전으로 전환하여 10월 8일 양문리에서 38도선을 돌파 후, 20일 북한군 잔적을 소탕하고 평양을 탈환함으로써 제1사단과 더불어 최초로 평양을 점령한 부대가 되었다. 연대는 11월에 평안남도 개천 동북방의 비호산과 덕천 전투에서 중공군과 격전을 치른 후. 승호리-신계-시변리-연천-춘천으로 단계적으로 철수하여 12월 15일 춘천 동북방의 38도선 일대에서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12월 31일 중공군은 제3차 공세를 감행했고, 연대는 북한군 제10사단의 집중 공격을 받고 영월 동북방으로 철수했다. 2월 11일 개시된 중공군 제4차 공세(2월 공세) 때 연대는 17~18일 양일간 치열한 전투 끝에 영월을 탈환했다. 유엔군의 킬러작전(2. 21.~3. 6.), 리퍼작전(3. 7.~3. 31.) 때 연대는 평창군 백석산 일대에서 적과 치열한 공방전 끝에 3월 12일 하진부리를 점령했다. 4월 초 국군과 유엔군은 38도선 상의 유리한 방어지역인 캔자스선(임진강-연천-화천저수지-양양을 잇는 선)을 확보하기 위해 공세를 개시했다. 이때 연대는 4월 중순 인제 서쪽의 관대리까지 진격했으나, 중공군 4월 공세(4. 22.~30.)에 밀려 인제 서남방의 신풍리 일대까지 후퇴했다. 5월 16일 중공군 5월 공세가 시작되었고, 연대는 중공군 제79·81사단의 집중공격을 받고 풍암리까지 후퇴했다.
유엔군은 5월 하순 공세로 전환했다. 이때 연대는 6월 7일부터 12일까지 양구 서북방의 군량현 일대에서 치열한 교전 끝에 ‘신 캔자스선’ 상의 마석봉-504고지-757고지를 잇는 선을 확보했다. 연대는 8월 9일 백석산 남쪽의 554고지, 917고지를 공격하여 적의 강력한 저항을 물리치고 9월 18일 목표를 확보했다.
연대는 26일 백석산 주봉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으나, 북한군 제32사단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고지 탈취에 실패하고 28일 동 임무를 제8사단에 인계 후 양구로 이동했다. 이 전투에서 이 이병은 앞장서서 공격하다 적탄에 맞아 중상을 입고 후송되었으나, 11월 28일 끝내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병희 이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유해(31묘역-판-24604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53-ㅂ-084)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