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보갑(李輔甲)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0327052
  • 전몰일자 : 19520605

공훈사항

이보갑 일병은 경기도 평택군(現 평택시) 오성면에서 출생했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6·25전쟁 발발 후 국군과 유엔군이 북진작전을 한참 진행하던 1950년 10월 초순경 입대하여, 제주도에 위치한 육군 제5훈련소에서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육군직할 포병사령부에 배치되었다.
포병의 역사는 1948년 6월 26일 서울 용산에 제2포병훈련학교를, 경남 진해에 제3포병훈련학교를 설치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11월 20일에는 제2, 3포병훈련학교를 해체하고 육군 잠정포병단을 설치하여 그 예하로 육군포병학교를 두었다. 잠정포병단은 동년 12월 15일 잠정포병사령부로 개칭되었고, 이는 1949년 6월 20일 다시 육군 포병연대로 개편되었으며, 포병연대는 10월 15일에 육군 포병학교로 개칭되었다.
6·25전쟁이 발발하고 1950년 7월 5일 부대 재편성과 제1군단의 창설에 따라 포병 제1·3·5·6·7대대가 해체되고 제1야전포병단이 창설되었으며, 포병단 예하로 제10·11·16·17·18·50대대가 창설되었다. 포병대대들은 육본 통제에 따라 위급한 축선에 우선 지원되다가, 9월 10일 부로 제1포병단에서 각 사단으로 예속이 변경되었다. 이후 12월 9일 부로 제16포병대대는 육군직할에서 제7사단으로, 제18포병대대는 제7사단에서 육군직할로 예속을 변경했다.
이보갑 일병이 포병사령부에 배치될 무렵의 전황은 압록강 및 두만강까지 북진한 국군과 유엔군이 중공군의 참전으로 38도선으로 철수하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포병사령부는 12월 23일 다시 대구로 이동하였으며 제7훈련소를 개칭한 포병훈련소도 12월 29일 진해로 이동했다. 이 때 이보갑 일병은 제7훈련소로 조교요원으로 전속되었다.
1951년에 접어들면서 중공군의 대규모 신정 공세로 1월 3일 정부는 부산으로 천도하였고 국군과 유엔군은 서울 남쪽으로 철수를 개시하여 1월 5일 국군 제1, 3군단이 원주-삼척선으로, 1월 6일에 서부전선의 美 제1, 9군단이 평택-장호원선을 점령했다. 그 후 유엔군과 공산군은 지루하게 휴전협상을 진행하면서 고지 쟁탈전을 지속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이보갑 일병은 포병요원 양성에 여념이 없는 가운데 제7훈련소 기동타격대로서 적 게릴라 소탕 작전에 앞장서 왔다. 그는 1952년 6월 5일 훈련소 인근에 출몰한 게릴라를 격멸하기 위해 대원들과 함께 교전하다가 적의 총탄에 맞아 장렬하게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보갑 일병의 공적과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하여 전쟁기념관 전사자 명비(087-ㄱ-076)에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 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