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보동(이보동)

  • 군별 : 육군
  • 계급 : 하사
  • 군번 : 0143218
  • 전몰일자 : 19500920

공훈사항

이보동 하사는 경상남도 마산시 회원동에서 출생했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6·25전쟁 당시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방어선에서 북한군의 총공세를 저지하던 1950년 8월 하순, 경북 대구의 육군 제1훈련소로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훈련소에 잔류하여 조교 임무를 수행했다.
북한군의 남침으로 6·25전쟁이 발발한 이래로 수많은 전사자가 발생함에 따라 병력 보충문제가 가장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이에 육군본부는 병력 확보와 각 지역방위 임무를 동시에 해결할 목적으로 7월 초순, 각 도에 편성관구사령부를 설치하고 신병 확보와 더불어 후방지역작전 임무를 수행하도록 했다. 이에 따라 경북편성관구사령부가 대구에서 창설되었고, 신병교육을 위해 7월 11일에 제25교육연대가 창설되었다. 이후 7월 17일에 제7교육대로 개칭되었고, 8월 1일에 육군중앙훈련소로 개칭되었다가, 8월 14일에 육군본부 직할로서 육군 제1훈련소로 재창설되었다.
이보동 하사가 육군 제1훈련소에 배치될 무렵 전황은,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방어선에서 북한군의 8월 공세를 맞이하여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하고 있었고, 훈련소는 창설 직후로서 신병교육과 적 게릴라 소탕작전에 여념이 없었다. 한편, 대구 지역은 1948년 11월 제6연대 반란사건이 일어나는 등 좌익 빨치산 세력들의 활동이 심했던 지역이었다. 국군과 유엔군이 반격으로 전환한 후에는 미처 도주하지 못한 패잔병들이 대구 인근의 팔공산이나 보현산 등을 근거지로 하여 후방교란 활동을 계속했다. 대구에는 육군본부와 미 제8군사령부, 각종 지원부대, 정부기관 등이 밀집되어 있어 게릴라들의 좋은 공격 목표가 되고 있었다.
당시 상황이 긴급했고 병력도 부족했기 때문에, 육군 제1훈련소는 신병훈련에 주력하면서도 동시에 인근에 출몰한 적들의 유격활동에 대응해야 했다. 훈련소는 조교를 포함한 기간요원으로 기동타격대를 편성하여 이들에 대한 소탕작전을 해 왔다. 그러던 중 9월 20일 대구 인근에 적 게릴라가 출몰했다는 신고가 들어왔고, 이보동 하사가 소속된 기동타격대는 즉각 출동하여 치열한 전투 끝에 격멸했다. 이날 그는 선두에서 용감하게 싸우다가 적들의 기습사격에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보동 하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23판-14면-8764호)를 국립대전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123-ㄱ-057)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