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복구(이복구)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0744606
  • 전몰일자 : 19510328

공훈사항

이복구 일병은 출생 기록이 없다. 그는 6·25전쟁 당시 국군과 유엔군이 중공군의 대규모 공세로 평택-삼척선으로 후퇴하던 1951년 1월 8일 육군에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육군직할 방위사관학교로 배치되었다.
이복구 일병이 부대에 배치될 무렵 전황은 국군과 유엔군이 중공군의 제3차 공세(신정공세)를 격퇴하고 반격을 준비하던 상황이었다. 압록강 및 두만강으로 진격했던 국군과 유엔군은 1950년 10월 25일부터 시작된 중공군의 두 차례 기습공격에 38도선까지 철수하여 방어에 임하였으나, 중공군의 제3차 공세(신정공세)에 또 다시 밀려 37도선 일대까지 철수하여 공산군과 공방전을 전개하고 있었다.
한편,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수많은 보충 인력이 소요되었다. 이에 국방부는 1950년 12월 21일 대한청년단과 청년방위대를 기간으로 하고 제2국민병역을 대상으로 후방예비부대 성격의 국민방위군을 창설했다. 그리고 이를 이끌 간부 육성을 위해 방위사관학교를 대구에 함께 설치했다.
국민방위군은 청·장년을 후방의 안전한 지역으로 집단 철수시켜 예비전력 확보 및 장차 필요한 병력 보충원으로 활용한다는 목적 하에 창설되었다. 이복구 일병은 1951년 1월 중순경 방위사관학교에 입교하여 교육훈련을 받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 대구에는 정부기관과 육군본부, 미 제8군사령부, 각종 지원부대 등이 밀집되어 있어 이들에 대한 북한군 정찰대와 좌익 빨치산 세력들의 습격, 파괴활동이 심했다. 특히 이들의 유격활동은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선이 38도, 37도선까지 남하하자 더욱 극심해졌다. 그리고 우익 인사에 대해 테러를 하거나 민간인을 납치하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이들은 때로는 신병훈련소와 방위사관학교를 급습하여 훈련병을 사살하고 정상적인 교육훈련이 이루어지지 못하도록 방해했다. 1951년 3월 28일 적 게릴라들이 방위사관학교를 습격했고, 훈련병들은 이들을 격멸했다. 이때 이복구 일병은 훈련병과 함께 게릴라와 교전 중 적의 총탄에 맞아 중상을 입고 후송되었으나, 증상이 악화되어 안타깝게도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복구 일병의 공적과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하여 그의 유해(33판-40면-21991호)를 국립대전현충원에 설치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125-ㄷ-109)에 그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