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영구(李榮九)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K1102725
  • 전몰일자 : 19511122

공훈사항

이영구 일병은 1933년 2월 28일에 충청남도 대덕군 진잠면(現 대전광역시 유성구 진잠동)에서 출생했다. 그는 6·25전쟁 발발 후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방어선에서 북한군의 공세를 저지하던, 1950년 8월 16일 입대하여 경남 구포에 있는 제3훈련소에서 기초군사훈련을 받고, 카투사(KATUSA, 주한 미군에 파견된 한국군)병으로 차출되었다. 이 일병은 美 제25사단에 배치되어 복무하다가 육본 직할부대로 전속되었다.
이영구 일병이 부대에 배치될 무렵 전선은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방어선에서 북한군의 8월 공세와 9월 공세를 격퇴하고 반격으로 전환하면서, 1950년 10월 1일 38도선을 돌파하고 북진을 계속하여 한・만 국경선에 도달했다. 그러나 10월 25일부터 시작된 중공군의 대규모 공세에 밀린 국군과 유엔군은 38도선까지 지연전을 실시하며 철수했다.
이후 몇 차례의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이영구 일병과 부대원들은 중공군의 강력한 공세에 밀려 38도선 이남으로 다시 철수하게 되었다. 1951년 1월 초 평택-제천-삼척을 연하는 37도선까지 후퇴하였던 국군과 유엔군은 다시 반격을 시작해 2월 10일에는 한강 남쪽에 도달했다. 이영구 일병과 부대원들도 국군의 진격에 맞추어 수도권 일대에서 후방지역 방호작전을 다시 전개했다. 그 후 3월 15일에는 서울을 재수복했다. 이영구 일병과 부대원들은 서울로 진주해 패잔병 소탕작전에 투입되었다. 북한군 무장공비들은 아군의 북진작전 간 도주하지 못한 패잔병과 중공군의 신정공세 시기에 잠입한 북한군 제10사단의 패잔병들로서 후방교란 활동을 계속하고 있었다.
1951년 4월에 접어들어 국군과 유엔군은 중공군의 춘계공세를 저지하기 위하여 모든 전력을 경주했다. 그러다가 국군과 유엔군은 5월 하순 반격작전을 전개하여 중공군을 섬멸하면서 적에게 막대한 인적, 물적 손실을 가하고 고지를 확보함으로써, 1개월간에 걸쳐 최대 역량을 투입한 중공군의 춘계공세를 격퇴하며 적의 종심기동을 저지했다.
1951년 후반기 대부분의 전선에서는 연대급 이하의 전초진지 쟁탈전이 반복된 소부대전투의 연속이었으며 거의 소강상태이었다. 이영구 일병은 1951년 11월 22일 분대원과 함께 강원도 양구 일대에서 방어작전 간 적 총탄에 맞아 장렬하게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영구 일병의 공적과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하여 전쟁기념관 전사자 명비(087-ㄹ-015)에 그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 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