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영구(李榮求)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0347390
- 전몰일자 : 19510201
공훈사항
이영구 일병은 서울특별시 성동구(現 중구) 신당동에서 출생했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6·25전쟁 발발 후 국군이 낙동강 선까지 철수하면서 대한민국이 위기에 처하자, 1950년 8월 30일 입대하여 제주도에 위치한 제5훈련소에서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제3사단 제22연대로 배치되었다. 제22연대는 1948년 11, 12월 발생한 연대 내 좌익세력의 반란사건으로 1949년 4월 15일 해체된 제6연대를 개칭한 부대이다.
이영구 일병이 부대에 배치될 무렵 전황은 인천상륙작전 성공을 계기로 국군이 1950년 9월 16일 총반격작전으로 전환했고, 제3사단도 반격 중이었다. 사단은 9월 22일 추격작전으로 전환했다. 연대는 파죽지세로 나아가 장사동-평해-울진-삼척-강릉(30일)을 탈환하면서, 일일 평균 17.3km의 속도로 진격했다. 연대는 10월 2일 38도선을 돌파하여 일일 평균 24km의 속도로 북진하여 강원도 장전, 통천을 거쳐 10월 10일 원산을 점령했다. 사단은 원산 외곽 경계를 하다가 11월 4일 신북청으로 북상했다. 11월 11일 연대는 길주-백암-혜산진으로 북진하여 11월 30일 연대의 선두부대가 한·중 국경선의 혜산진에 도달했으나, 중공군의 참전으로 성진-흥남으로 철수했다. 12월 10일 연대는 흥남에서 해상철수를 개시하여 영일만 일대 구룡포에 상륙했다.
사단은 12월 20일경 홍천으로 이동하여 소양강 변의 관대리 일대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중공군은 12월 31일 전 전선에 걸쳐 제3차 공세를 감행했고, 이영구 일병이 소속된 연대는 북한군 제10사단의 집중공격에 맞서 분전했으나 진지를 돌파당하고 평창 일대로 철수했다. 국군 철수과정에서의 부대간격을 이용하여 북한군 제2군단이 영월-영주 방향으로 깊숙이 침투했다. 이에 사단은 봉화군 춘양으로 이동하여 후방지역 적 탐색격멸작전에 들어갔다. 연대는 1951년 1월 14일부터 22일까지 영주 동남쪽 남대리 부근의 주실령, 옥석산, 어래산 일대에서 침투한 적 제31사단을 포위 격멸했다.
이후 2월 초순 美 제10군단과 국군 제3군단이 라운드업 작전을 전개하여 반격했고, 이때 사단은 美 제10군단에 배속되어 2월 10일 평창으로 북상하여 횡성 동북방의 제5사단 작전지역을 인수했다. 이영구 일병은 1951년 2일 1일 영주지역 어래산 일대에서 분대원과 함께 북한군 침투부대와 교전 중 적의 총탄에 맞아 장렬하게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영구 일병의 공적과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하여 그의 위패(20판-2면-037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설치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85-ㅊ-023)에 그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