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영규(이영규)

  • 군별 : 육군
  • 계급 : 대령
  • 군번 : 10122
  • 전몰일자 : 19500704

공훈사항

이영규 대령은 강원도 춘천시 교동에서 출생했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광복 후 조국의 호국간성이 되고자, 1946년 5월 1일 조선경비사관학교에 제1기로 입교하여 45일간 교육훈련을 받고 동년 6월 15일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이 대령은 각급 부대의 지휘관과 참모를 역임하며 창군 초기 온갖 역경 속에서도 군의 기초를 닦는 데 공헌했다.
이 대령은 6·25전쟁 발발 당시 제7사단 작전참모로서 계급은 중령이었다. 제7사단은 적 주공방향으로 판단된 의정부 축선의 양주군 적성에서 사직리까지 47km 정면의 38도선 방어를 담당하고 있었다. 북한군은 동두천 축선에 제4사단과 제203전차연대 1개 대대를, 포천 축선에 제3사단과 제105전차여단을 투입했다. 사단은 북한군의 T-34 전차를 파괴할 수 있는 대전차 무기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병력 면에서는 7배, 화력 면에서는 18배나 우세한 적과 전투를 벌일 수밖에 없었다.
전쟁이 발발하자 이 대령은 사단 작전을 통제하며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하고자,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압도적인 적의 공격에 사단은 개전 첫날 포천을 내주었고, 26일에는 동두천, 의정부가 함락되었다. 사단은 창동-미아리 방어선에서 분전했으나 적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했고, 사단사령부는 28일 노량진에서 한강을 도하하여 철수했다. 6월 29일부터 시흥지구전투사령부가 편성되었고, 혼성 제7사단은 노량진 방면의 한강선 방어 임무를 수행했다. 사단은 7월 2일까지 적의 도하를 저지하였으나, 전투력이 소진되어 7월 5일 해체되었다.
이 대령은 전남 순천으로 이동하여 제5사단 제15연대 부연대장으로서 신병 모집과 부대 편성에 주력했다. 북한군 제6사단이 7월 16일부터 호남지역으로 우회 기동하여 남진함에 따라 국군은 경찰과 소수의 군소 부대로 적의 남진을 저지하고자 했다. 이 대령은 300명 규모의 부대(이영규 부대)를 편성하여 민기식 대령(민부대장) 지휘하에 7월 24일부터 남원-구례-하동으로 지연전을 전개했다. 이영규 부대는 8월 12일 민부대에 통합되었고, 민부대는 8월 20일 제7사단이 재창설되면서 그 예하의 제5연대로 재창설되었다. 이때 이 대령은 제5연대장에 임명되었다. 이 대령은 내 손으로 조국을 지켜내고 말겠다는 일념으로 동분서주하면서 낙동강방어선에서 연대를 진두지휘하며 분투했다. 하지만 그는 8월 25일 신녕지구에서 전투 지휘 중에 아군이 설치한 지뢰가 터지면서 안타깝게도 전사하고 말았다. 이 대령은 전사 후 중령에서 대령으로 추서되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영규 대령의 혁혁한 전공과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을지무공훈장(훈기번호 200 국)을 추서하고, 그의 위패(47판-1면-004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122-ㅊ-068)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