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영기(이영기)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6200070
- 전몰일자 : 19501026
공훈사항
이영기 일병은 경상북도 경산군(現 경산시) 남산면에서 출생했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자유를 지키고 조국에 헌신하고자, 1949년 7월 28일 육군에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받고 타부대에 배치되어 38도선 경비임무와 교육훈련에 전념했다.
6·25전쟁이 발발하고 이 일병은 독립 제1유격대로 전속되었다. 육군본부에서는 1950년 8월 낙동강방어선의 동부전선인 포항지구에서 북한군의 공세를 차단하는 동시에 상륙기습을 통한 양동작전을 계획했다. 하지만 가용부대가 없자 밀양에서 훈련 중이던 유격부대를 선정했는데, 바로 육군 독립 제1유격대(일명 명부대 또는 제772부대)였다. 이 부대는 대구와 밀양 등지에서 모집한 대한청년단, 학도병 등 772명으로 4개 중대로 편성된 대대였으나 적 기만과 부대원 사기를 고려하여 대대를 사단으로, 중대를 연대로 호칭하여 제28·29·32·37연대로 위장 편성하고, 계급도 위장했다.
이영기 일병이 소속된 제1유격대는 영덕 지구에 상륙하여 북한군 제2군단의 후방을 교란함과 동시에, 유엔군 총반격작전 시 북한군의 퇴로 차단을 위해 장사동 상륙작전을 실시했다. LST(미군은 상선으로 기록) 문산호는 9월 14일 오후 4시에 유격대를 탑재하고 부산항을 출항, 9월 15일 새벽 5시경 장사동 부근 해상에 도착했다. 대대는 태풍 케지아로 인한 높은 파도와 아군의 상륙을 알아차린 북한군의 포격으로 완전히 육지에 착안하지 못하고 해안에서 20~30미터 떨어진 상태에서 상륙을 감행했다.
이 과정에서 북한군이 문산호와 상륙 중인 아군에 대해 집중 사격을 가해옴으로써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고, 문산호까지 닻이 끊어지며 파도에 휩쓸려 좌초되었다. 유격대는 이런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고 9월 15일 오전 9시 경 상륙을 완료했다.
이영기 일병과 유격대원들은 상륙 후에도 적에게 포위되어 끊임없이 공격을 받았고, 그 때마다 똘똘 뭉쳐 강한 투혼을 발휘하여 적을 물리쳤다. 하지만 적진 속에 고립된 가운데에서의 전투에는 한계가 있었다.
육군본부는 유격대의 철수를 결정했고, 한국 LST 조치원호와 미군 LST 2척 등이 장사동으로 파견되었다. 9월 19일 북한군의 집중 사격을 받아 사상자가 속출하는 가운데서도 韓·美 해군은 죽음을 무릅쓰고 구출작전을 전개하여, 마침내 670명을 구출하면서 부산항으로 귀환했다. 이 전투에서 이영기 일병은 영덕 일대 장사동에서 적탄에 맞아 중상을 입고 후송되었으나 10월 26일 안타깝게도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영기 일병의 공적과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하여 그의 위패(35판-2면-158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설치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123-ㅈ-087)에 그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 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