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영기(이영기)

  • 군별 : 육군
  • 계급 : 소령
  • 군번 : 208950
  • 전몰일자 : 19530403

공훈사항

이영기 소령은 1928년 8월 26일 경상북도 칠곡군 동명면에서 출생했다. 그는 6·25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나라를 구하고자 일어섰다. 이 소령은 1951년 1월 10일 현지 임관하여 수도사단 제18연대에 배치되었다.
이 소령이 부대에 배치될 무렵 유엔군은 중공군 제3차 공세로 1·4후퇴를 단행하여 37도선으로 철수하여 전열을 가다듬고 있었고, 제3사단은 제3군단에 배속되어 군단 예비로 경북 춘양에 집결 중이었다. 이 시기 북한군 제2군단이 유엔군의 후방지역을 교란하기 위해 중동부 전선으로 침투했다. 연대는 1월 15일부터 19일까지 치열한 공방전 끝에 북한군 제31연대의 거점인 경상북도 영주군 남대리 일대를 완전히 점령했다.
2월 11일 중공군은 제4차 공세(2월 공세)를 감행했다. 이때 연대는 미 제187연대전투단에 배속되어 횡성의 섬강 일대에서 중공군 제197사단과 혈전을 벌였다. 연대는 유엔군의 킬러작전(2월) 때는 봉화산 일대에서, 리퍼작전(3월) 때는 하진부리 일대에서 격전을 벌였으며, 3월 28일까지 38도선 상의 현리-하서림을 연하는 선을 확보했다. 이후 연대는 평창, 현리, 인제 일대를 오르내리며 1951년 5월까지 중공군 제4, 5차 공세에 맞서 공방전을 전개했다. 연대는 5월 25일 제1군단으로 배속 전환되어 양양, 간성 일대에서 군단의 후방지역작전을 수행하다, 10월 20일부로 미 제10군단으로 배속 변경되어 양구 동북방 가칠봉으로 이동하여 1,211고지에서 적과 공방전을 펼쳤다.
사단은 1952년 1월 12일부로 미 제9군단으로 배속 전환되어 백석산 서북방 임남 일대의 북한강~739고지~949고지~석장리 간의 전선을 담당했다. 1952년 4월 5일 재창설된 제2군단이 미 제9군단의 전선을 인수함에 따라 사단은 제2군단으로 배속 전환되었다. 9월 28일 중공군 제203사단이 사단의 전초진지인 피의고지 및 독수리고지에 대규모 공격을 가해왔다. 이 고지에 배치된 제22연대가 고지를 탈취당하자 제18연대가 역습을 실시했고, 10월 2일까지 치열한 전투 끝에 이 고지들을 지켜냈다.
중공군은 국군의 금성 돌출부에 대한 본격적인 하계공세를 시작하기 전에 서전으로, 1953년 4월 2일 사단의 전초가 설치된 689고지에 대해 대대적인 공격을 개시했다. 연대 장병들은 중공군 제181사단의 공격을 맞아 12일까지 8번이나 고지의 주인이 바뀌는 혈전을 거듭한 끝에 이 고지를 지켜냈다. 이 전투에서 이 소령은 중대를 진두지휘하여 앞장서서 분투하다, 4월 3일 적탄에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영기 소령의 혁혁한 전공과 숭고한 희생을 기려 화랑무공훈장(훈기번호 61820 육)을 추서하고, 그의 유해(장병1묘역-201판-271호)를 국립대전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113-ㅊ-077)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