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영길(李永吉)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0401969
- 전몰일자 : 19511007
공훈사항
이영길 일병은 1932년 2월 8일에 전라북도 옥구군(現 군산시)에서 출생했다(세부 출생 장소 미상). 그는 6·25전쟁 발발 후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 선을 점령하고 방어편성을 하던, 1950년 8월 1일 육군에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육본 직할부대에 배치되었다.
이영길 일병이 부대에 배치될 무렵 전선은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방어선에서 북한군의 8월 공세와 9월 공세를 격퇴하고 반격으로 전환하면서, 1950년 10월 1일 38도선을 돌파하고 북진을 계속하여 한・만 국경선에 도달했다. 그러나 10월 25일부터 시작된 중공군의 대규모 공세에 밀린 국군과 유엔군은 38도선까지 지연전을 실시하며 철수했다. 이후 몇 차례의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이영길 일병과 부대원들은 중공군의 강력한 공세에 밀려 38도선 이남으로 다시 철수하게 되었다. 1951년 1월 초 평택-제천-삼척을 연하는 37도선까지 후퇴하였던 국군과 유엔군은 다시 반격을 시작해 2월 10일에는 한강 남쪽에 도달했다. 이영길 일병과 부대원들도 국군의 진격에 맞추어 수도권 일대에서 후방지역 방호작전을 다시 전개했다.
그 후 3월 15일에는 서울을 재수복했다. 이영길 일병과 부대원들은 서울로 진주해 패잔병 소탕작전에 투입되었다. 북한군 무장공비들은 인천상륙작전 당시 후방이 차단되었던 북한군의 일부가 중공군의 제3차 공세(신정공세) 시기에 잠입한 북한군 제10사단의 패잔병들과 연결해 산악지대에 은거하면서 후방교란 활동을 계속하고 있었다.
1951년 4월에 접어들어 국군과 유엔군은 중공군의 춘계공세를 저지하기 위하여 모든 전력을 경주했다. 그러다가 국군과 유엔군은 5월 하순 반격작전을 전개하여 중공군을 섬멸하면서, 1개월간에 걸쳐 최대 역량을 투입한 중공군의 춘계공세를 격퇴하며 적의 종심기동을 저지했다. 이후 국군과 유엔군은 캔자스(Kansas)선(임진강-연천-화천저수지-양양을 잇는 선)에서 중공군과 공방전을 벌였다.
이 일병이 소속된 부대는 강원도 원주 일대 후방지역작전을 수행했다. 이영길 일병은 1951년 10월 7일 분대원과 함께 원주 신림 일대에 출현한 적 게릴라를 추격 후 교전하다가 적의 기습사격에 맞아 장렬하게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영길 일병의 공적과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하여 그의 위패(24판-4면-182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설치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86-ㅊ-106)에 그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 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