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영달(李榮達)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0362437
- 전몰일자 : 19530407
공훈사항
이영달 일병은 경상북도 영일군 지행면에서 출생하였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국군과 유엔군이 북한군의 남진을 지연하던 1950년 7월 10일, 육군에 입대하여 육본 직할 제1503부대에 배치되었다.
제1503부대는 육군본부와 함께 7월 14일에 대전에서 대구로 축차적으로 철수했다. 부대는 철수 과정에서도 한강방어선-청주-상주 축선으로 지연전을 실시하는 국군을 지원했다. 북한군이 계속 남진함에 따라 국군과 유엔군은 8월 1일부터 낙동강방어선을 편성하고 북한군의 공세를 저지했다. 국군과 유엔군은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낙동강방어선에서 총반격으로 전환하여 북진했고, 제1503부대도 공세로 전환하여 북진에 동참했다. 국군은 1950년 10월 1일 38도선을 돌파하고 북진을 계속해 한・만 국경에 도달하였다. 그러나 10월 25일부터 시작된 중공군의 대규모 공세에 밀려 38도선으로 철수했다.
1951년 1월 초 평택-삼척을 잇는 37도선까지 후퇴하였던 국군은 다시 반격을 시작해 2월 10일에는 한강 남쪽에 도달했다. 이 일병과 장병들도 국군의 진격에 맞추어 수도권 일대에서 후방지역 방호작전을 재개했다. 3월 15일 서울을 재수복되자, 이 일병과 제1503부대 장병들은 서울로 진주해 패잔병 소탕작전에 투입되었다. 인천상륙작전 당시 후방이 차단되었던 북한군 패잔병 일부가 중공군의 제3차 공세(신정공세) 시기에 잠입한 북한군 제10사단의 패잔병들과 연결해 산악지대에 은거하면서 후방교란 활동을 계속하고 있었다.
공산군은 춘계공세(4월 공세, 5월 공세)를 전개했고, 이 일병과 장병들은 중공군의 춘계공세를 저지하기 위하여 모든 전력을 경주하였다. 장병들은 5월 하순 반격작전을 계속하여 공산군에 막대한 인적, 물적 손실을 가하면서 38도선과 캔자스선(임진강~연천~화천저수지~양양을 잇는 선)을 확보했다. 1951년 7월부터 휴전회담이 진행되면서 전선은 교착되었고, 전투양상은 국지적인 고지쟁탈전으로 변모하여 계속 이어졌다. 이 일병은 솔선수범하여 앞장서서 임무를 수행하다 1953년 4월 7일 적탄에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영달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22판-4면-269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명비(088-ㅅ-056)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