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영달(李永達)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0146467
- 전몰일자 : 19510205
공훈사항
이영달 일병은 1931년 12월 30일에 경상남도 함안군에서 출생했다. 그는 6·25전쟁 당시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방어선에서 북한군의 총공세를 격퇴하고 반격으로 전환했던 1950년 9월 15일, 경북 대구의 육군 제1훈련소로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제2사단 수색대로 배치되었다.
이영달 일병이 부대로 배치되었던 11월 초순, 제2사단은 11월 7일에 국본 일반명령 제103호에 의거 서울에서 재창설되어 가평에 지휘소를 두고 철원, 의정부, 구화리, 홍천 일대에서 후방지역작전을 실시하고 있었다. 그가 소속된 수색대는 후방지역작전 간에 미처 도망가지 못한 북한군 패잔병을 발견하여 격멸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당시 포천, 평강, 구화리 일대에서 병참선 차단 등 적극적인 후방지역 교란 활동을 하고 있었다. 북한군 패잔병들은 일반적인 공비수준을 넘어서는 중대 및 대대 규모로 지휘체계를 유지하여 활동하고 있었다. 이들은 유엔군의 병참선 경비부대를 공격하여 수송체계를 교란할 뿐만 아니라 보급소 및 탄약고 등 주요시설을 공격하였다.
한편 압록강까지 진격했던 국군과 유엔군의 주력이 중공군의 기습공격으로 38선으로 철수하게 되자, 사단은 수색작전을 멈추고 12월 8일에 포천 북방의 양문리-탑두울을 잇는 선에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사단 장병들은 방어진지 구축과 수색작전을 강화했고, 이영달 일병이 소속된 사단 수색대는 추후 예상되는 중공군 공격에 대비하여 방어진지 전방에서 수색작전을 강화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중공군은 12월 31일 야간에 3차 공세(일명 신정공세)를 시작하여 서울을 공격했다. 적은 아군의 후방을 차단하며 포위 섬멸하고자 했다. 제2사단은 전투력의 열세로 1951년 1월 1일 새벽에 진지에서 철수했다. 사단 장병들은 후방에 설치한 적들의 차단선을 돌파하여 1월 3일에 청평에 도착했다. 그리고 1월 7일에는 충주에 집결한 후 미 제10군단의 예비사단으로 풍기에서 재정비하며 충주-단양 간 병참선을 경계했다. 이영달 일병이 소속된 수색소대는 2월 5일에 단양에서 병참선 경계를 하던 중 적 1개 소대 규모로부터 습격을 받았으나 치열한 전투 끝에 격퇴했다. 이날 전투에서 그는 선두에서 가장 용감하게 싸우다가 적이 쏜 총탄에 맞아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영달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03판-2면-123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18-ㅈ-081)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