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영덕(이영덕)
- 군별 : 육군
- 계급 : 하사
- 군번 : 0159670
- 전몰일자 : 19510108
공훈사항
이영덕 하사는 1930년 11월 10일에 경상북도 출생했다(세부 출생 장소 미상). 그는 6·25전쟁 발발 후 북진하였던 국군과 유엔군이 중공군의 참전으로 38도선으로 후퇴하던, 1950년 12월 6일 입대하여 대구에 있는 육군 제1훈련소에서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훈련소 조교요원으로 배치되었다.
한편, 개전 이래 수많은 전사자가 발생함에 따라 병력 보충문제가 가장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이에 육군본부는 병력 확보와 각 지역 방위임무를 동시에 해결할 목적으로 1950년 7월 초순 각 도별로 편성관구사령부를 설치하고 신병 확보와 더불어 후방지역작전 임무를 수행하도록 했다.
이에 따라 경북편성관구사령부가 대구에서 창설되었다. 그리고 신병교육을 위해 7월 11일 제25교육연대가 창설되었으나, 7월 17일 경북편성관구사령부 제7교육대로 개칭되었다. 그 후 8월 1일 이 교육대가 육군중앙훈련소로 개칭되었다가, 8월 14일 국본 일반명령 제46호로 대구에서 육군본부 직할로서 육군 제1훈련소로 재창설되었다.
이영덕 하사가 제1훈련소에 배치될 무렵 전황은 거의 압록강까지 진격하였던 국군과 유엔군이 중공군의 참전으로 38도선으로 철수하여 방어 편성하던 상황이었고, 훈련소는 신병교육에 여념이 없었다.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방어선에서 반격으로 전환한 후에는 미처 도주하지 못한 패잔병들이 대구 인근의 팔공산(1,192m)이나 보현산(1,126m) 등을 근거지로 하여 이들 빨치산들과 연계하여 후방교란활동을 계속했다.
대구에는 육군본부와 美 제8군사령부, 각종 지원부대와 시설 등이 밀집되어 있어 게릴라들의 공격 목표가 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상황이 긴급했고 병력도 부족했기 때문에, 제1훈련소는 신병훈련에 주력하면서도 동시에 인근에 출몰한 적들의 유격활동에 대응해야 했다. 제1훈련소는 조교를 포함한 기간요원으로 기동타격대를 편성하여 이들에 대한 소탕작전을 수행해 왔다. 1951년 1월 7일 美 제8군사령부 인근에 적이 출몰했다는 신고가 들어왔고, 기동타격대는 적 게릴라 소탕작전에 투입되어 격멸했다. 그러나 이영덕 하사는 분대원을 진두지휘하며 도주하는 적을 추격하다가 1951년 1월 8일 적의 기습사격에 맞아 장렬하게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영덕 하사의 공적과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하여 그의 위패(23판-15면-9055호)를 국립대전현충원에 설치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명비(125-ㅈ-004)에 그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 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