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영덕(이영덕)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0141208
  • 전몰일자 : 19501220

공훈사항

이영덕 일병은 1931년 3월 3일 경상북도 대구시 덕산동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 방어선에서 북한군의 최후공세를 격퇴하던 1950년 8월 21일, 경북 대구의 육군 제1훈련소로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훈련소에 잔류하여 조교 임무를 수행했다.
북한군의 남침으로 6·25전쟁이 발발한 이래로 수많은 전사자가 발생함에 따라 병력 보충문제가 가장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이에 육군본부는 병력 확보와 각 지역방위 임무를 동시에 해결할 목적으로 7월 초순, 각 도에 편성관구사령부를 설치하고 신병 확보와 더불어 후방지역작전 임무를 수행하도록 했다. 이에 따라 경북편성관구사령부가 대구에서 창설되었고, 신병교육을 위해 7월 11일에 제25교육연대가 창설되었다. 이후 7월 17일에 제7교육대로 개칭되었고, 8월 1일에 육군중앙훈련소로 개칭되었다가, 8월 14일에 육군본부 직할로서 육군 제1훈련소로 재창설되었다.
이영덕 일병이 육군 제1훈련소에 배치될 무렵 국군과 유엔군이 철수를 거듭하여 낙동강 방어선까지 철수하게 되자 북한군은 제3사단과 제13사단 그리고 제1사단 등 3개 사단으로 9월 2일부터 다부동 지역을 돌파했으며, 일부 부대는 팔공산까지 위협하였다. 대구지역은 1948년 11월 제6연대 반란사건이 일어나는 등 좌익 빨치산 세력들의 활동이 심했던 지역이었다. 국군과 유엔군이 반격으로 전환한 후에는 미처 도주하지 못한 패잔병들이 대구 인근의 팔공산이나 보현산 등을 근거지로 하여 후방교란 활동을 계속했다. 대구에는 육군본부와 미 제8군사령부, 각종 지원부대, 정부기관 등이 밀집되어 있어 게릴라들의 좋은 공격 목표가 되고 있었다.
당시 육군 제1훈련소는 신병양성에 주력하면서도 인근에 출몰한 적들의 유격활동에 대응해야 했다. 훈련소는 조교를 포함한 기간요원으로 기동타격대를 편성하여 이들에 대한 소탕작전을 해왔다. 1950년 12월 20일에 대구 외곽에 적이 출몰했다는 신고가 들어왔고, 이영덕 일병이 소속된 기동타격대는 적 게릴라 소탕작전에 투입되어 격멸했으나, 그는 도주하는 적을 추격하다 적의 기습사격에 맞아 안타깝게도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영덕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위패(33판-41면-22548호)를 국립대전현충원에 모셔 살신보국정신을 기리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명비(124-ㅈ-051)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