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영도(李永道)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0334293
- 전몰일자 : 19530201
공훈사항
이영도 일병은 출생에 대한 기록이 없다. 그는 6·25전쟁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1950년 7월 3일 수도경비사령부 제8연대에 입대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연대는 창동방어선, 한강방어선에서 적의 공격을 지연시켰으나, 전투력 손실이 심해 7월 24일 해체되었다. 제7사단이 8월 20일 대구에서 제3·5·8연대를 예하부대로 하여 재창설되었고, 이때 이 일병은 제8연대로 전속되었다. 제8연대는 8월 하순부터 신녕지구 전투와 영천전투에 투입되어 혈전 끝에 적을 격퇴함으로써 낙동강방어선에서의 최대 위기를 극복하고 반격의 발판을 마련했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함에 따라 연대는 북진작전으로 전환하여 10월 8일 양문리에서 38도선을 돌파 후, 20일 북한군 잔적을 소탕하고 평양을 탈환함으로써 제1사단과 더불어 최초로 평양을 점령한 부대가 되었다. 연대는 11월에 개천 동북방의 비호산과 덕천 전투에서 중공군과 격전을 치른 후. 승호리-신계-시변리-연천-춘천으로 단계적으로 철수하여 12월 15일 춘천 동북방의 38도선 일대에서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이후 연대는 춘천, 영월, 횡성 일대에서 중공군 제3, 4차 공세를 맞아 혈전을 치렀고, 유엔군의 킬러작전(1951. 2. 21.~3. 6.), 리퍼작전(3. 7.~3. 31.) 때 평창군 백석산 일대에서 적과 치열한 공방전을 펼쳤다. 그리고 중공군 4월 공세(4. 22.~30.) 때는 소양강 변의 인제군 정자리, 신풍리 일대에서 격전을 치렀고, 1951년 5월 16일 시작된 중공군 5월 공세 때는 중공군 제79·81사단의 집중공격을 받고 풍암리까지 후퇴했다.
유엔군은 5월 하순 공세로 전환했다. 이때 연대는 6월 7일부터 12일까지 양구 서북방의 군량현 일대에서 치열한 교전 끝에 ‘신 캔자스선’(화천저수지-펀치볼-향로봉-거진 북방을 잇는 선) 상의 마석봉-504고지-757고지를 잇는 선을 확보했다. 연대는 8, 9월 동안 백석산과 그 일대 고지군에서 북한군 제32사단과 치열한 고지쟁탈전을 벌였다.
사단은 11월 20일 다시 미 제10군단에 배속되어 백석산 북방의 1,090고지~931고지~암동~319고지를 잇는 제8사단의 전선을 인수했다. 이후 휴전회담이 진행되면서 연대는 수색정찰, 매복, 교란작전 등을 지속했다. 이 일병은 1953년 2월 1일 수색정찰 작전 중에 북한군 제32사단 침투부대의 기습을 받고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영도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위패(13판-5면-151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54-ㅇ-046)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