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영두(李永斗)

  • 군별 : 육군
  • 계급 : 대위
  • 군번 : 202547
  • 전몰일자 : 19530714

공훈사항

이영두 대위는 1927년 3월 20일 경상남도 부산시 대창동에서 출생했다. 그는 6·25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나라를 구하고자 일어섰다. 이 대위는 예비역이었으나, 1950년 9월 17일 전시 소집되어 수도사단 제18연대에 배치되었다.
연대는 낙동강 전선의 기계전투에 투입되어 북한군 제12사단을 격퇴했다. 인천상륙작전 성공을 계기로 국군은 9월 16일 반격작전으로 전환했고, 연대는 10월 1일 38도선을 넘어 북진하여 10월 10일 원산을, 11월 25일 청진을 점령한 후 부령까지 진출하여 한·중 국경선을 목전에 두었으나, 중공군의 참전으로 30일 흥남으로 철수했다. 12월 10일 연대는 제3사단과 함께 흥남에서 해상 철수하여 부산에 상륙했고, 25일부로 제3사단으로 예속이 전환되었다.
제3사단은 12월 20일경 소양강 변의 관대리 일대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연대는 평창, 횡성, 현리, 인제 일대를 오르내리며 1951년 5월까지 중공군 제3~5차 공세에 맞서 공방전을 펼쳤다. 연대는 5월 25일 제1군단으로 배속 전환되어 양양, 간성 일대에서 군단의 후방지역작전을 담당하다가, 10월 20일부로 미 제10군단으로 배속 변경되어 양구 동북방 가칠봉으로 이동하여 1,211고지에서 적과 공방전을 펼쳤다. 사단은 1952년 1월 12일부로 미 제9군단으로 배속 전환되어 백석산 서북방 임남 일대의 북한강~739고지~949고지~석장리 간의 전선을 담당했다. 1952년 4월 5일 재창설된 제2군단이 미 제9군단의 전선을 인수함에 따라 사단은 제2군단으로 배속 전환되었다. 연대는 특별한 격전 없이 수색정찰과 교란작전, 진지보강작업을 병행했다.
중공군은 1953년 4월 2일 사단의 전초가 설치된 689고지에 대해 대대적인 공격을 개시했다. 연대 장병들은 중공군 제181사단의 공격을 맞아 12일까지 8번이나 고지의 주인이 바뀌는 혈전 끝에 이 고지를 지켜냈다. 중공군 제2단계 하계 공세(6월 공세)에 밀려 제5사단이 주저항선에서 물러나자 사단은 6월 15일 다시 제2군단에 배속되어 백암산 전방 북한강, 금성천 분기점 상의 529고지 전투에 투입되었다.
7월 13일 중공군은 금성 돌출부에 대해 총공세(7·13 공세)를 가했다. 금성천 북방의 여문리 일대에 배치된 연대는 중공군 제60군 예하 3개 사단의 집중 공격을 받아 흑운토령-주파령-산양리까지 후퇴했다. 이 전투에서 이 대위는 중대를 진두지휘하여 진지를 사수하며 분투하다, 7월 14일 적탄에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영두 대위의 혁혁한 전공과 숭고한 희생을 기려 화랑무공훈장(훈기번호 40562 육)을 추서하고, 그의 위패(47판-6면-073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29-ㅊ-084)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