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영득(李榮得)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0402322
- 전몰일자 : 19501205
공훈사항
이영득 일병은 1930년 3월 2일에 경상북도 영주군(現 영주시)에서 출생했다. 그는 6·25전쟁 발발 후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 선으로 후퇴하여 방어 편성하던, 1950년 8월 1일 육군에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받고 육본 직할부대에 배치되었다.
이영득 일병이 부대에 배치될 무렵, 국군과 유엔군이 축차적인 지연작전을 실시하여 1950년 8월부터 낙동강 선 방어작전에 돌입했다.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방어선에서 강력한 방어 작전을 전개하여 북한군의 8월 공세와 9월 공세를 막아내고 적을 격퇴함으로써 조국의 위기를 극복하고 9월 15일의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에 힘을 얻어 반격작전으로 전환했다. 이 일병과 부대원들은 원통-양구로 공격하는 수도사단을 지원하면서 동해안으로 진격을 계속했다. 이러한 기동로의 전환은 동해안 도로상에 2개 사단 6개연대의 부대가 집중되는 취약점을 조금이라도 덜고 태백산맥 동측에서 활동하는 패잔병을 소탕하기 위해서였다.
국군은 10월 1일 38도선을 돌파하고 북진작전에 돌입했다. 이 일병과 부대원들은 38도선 북쪽의 20km 지점인 동해안 가도의 양양-간성에 진출하는 등 동해안 도로를 따라 북상 중이었다. 이 무렵 간성 방어에 실패한 북한군은 고성-통천-고저 선에서의 축차적인 저항을 기도하였고, 일부 병력은 오대산. 설악산 등 산악으로 잠입하여 후방보급로를 차단하며 유격전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 일병과 부대원들은 이러한 북한군 패잔병을 격멸하면서 북진을 계속해 한・만 국경에 도달했다. 1950년 10월 25일부터 시작된 중공군의 대규모 공세에 밀린 국군과 유엔군은 지연전을 전개하며 38도선까지 철수했다.
이후 몇 차례의 공방전이 전개되었고 이 일병과 부대원들은 불법 참전한 중공군의 강력한 공세에 밀려 38도선 이남으로 다시 철수하게 되었다. 이영득 일병은 1950년 11월 20일 중공군의 공세로 인하여 철수하다가 기습침투한 중공군의 총탄에 맞아 장렬하게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영득 일병의 공적과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24판-5면-257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설치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84-ㅂ-037)에 그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 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