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영록(李永祿)
- 군별 : 공군
- 계급 : 이등중사
- 군번 : 3200610
- 전몰일자 : 19500821
공훈사항
이영록 이등중사는 1927년 1월 13일에 출생했다(출생 장소 미상). 그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으나 정치 및 사회적으로 여전히 혼란스럽던 1948년 12월 1일, 김포기지에 있는 육군항공기지사령부로 입대하면서 공군의 일원이 되었다.
이영록 이등중사가 입대하기 직전, 육군항공기지부대가 9월 1일에 김포비행장으로 이동하면서 김포기지는 한국 공군의 발상지가 되었다. 동년 9월 8일에 미 제7사단 비행대로부터 L-4연락기 10대를 인수받아, 9월 13일 여의도기지(汝矣島基地)에서 편대비행을 실시하였다.
공군은 1949년 10월 1일 대통령령 제254호로 공포된 공군본부직제령(空軍本部職制令)에 따라 창설되었다. 이로써 공군은 1,600명의 병력과 20대의 연락기를 갖고서 정식으로 육군에서 분리되어 독립하게 되었다. 같은 해 12월 17일 국방부 별관에 있던 본부 청사를 서울 중구 회현동으로 이전함으로써 공군 독립의 면모를 가시화하게 되었다.
이영록 이등중사는 1950년 6월 25일 여의도 항공기지에서 6·25전쟁이 발생했음을 알았다. 당시 북한 공군의 전력은 YAKᐨ9, ILᐨ10기를 포함 한 항공기 226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반면에 한국 공군은 연락 임무용 및 훈련기 수준의 Lᐨ4/5기 12대와 T-6기 10대 등 총 22대의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당시 한국 공군은 가용할 수 있는 모든 항공기를 동원해 북한군의 남진을 최대한 저지하고자 하였다. 6월 26일부터 T-6기는 8개의 폭탄을 장착하고 Lᐨ4/5기도 후방석의 관측사가 2개의 폭탄을 가슴에 안고 출격하여 저공비행으로 산간 계곡을 비행하며 북한군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6월 27일은 보유한 폭탄을 모두 사용함으로써 전 항공기는 정찰작전으로 전환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6월 27일부터 미 공군이 본격적으로 참전하여 제공권을 장악하자 한국공군은 보조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영록 이등중사는 주로 L-4/5기 후방석에 탑승하여 육군본부와 군단 또는 사단에 주요한 작전명령서를 전달하는 연락임무를 수행하였다. 그는 낙동강방어선 작전이 한창인 8월 21일에 저공비행으로 연락임무를 수행하다가 적의 대공사격에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이영록 이등중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48판-6면-046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91-ㄷ-047)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