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영만(李永万)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8821436
  • 전몰일자 : 19521111

공훈사항

이영만 일병은 1930년 12월 16일 전라남도 해남군 화원면에서 출생했다. 그는 6·25전쟁 당시 유엔군과 공산군 사이에 지루한 휴전협상이 진행되던 1952년 4월 22일, 제주도 모슬포에 있는 육군 제1훈련소에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받고 카투사(KATUSA) 병으로 분류되어 미 제3사단 제15연대에 배치되었다.
이 일병이 부대에 배치될 무렵 국군과 유엔군은 캔자스선(임진강~연천~화천저수지~양양을 잇는 선)과 그 북방 일대에서 공산군과 대치하고 있었다. 그리고 미 제3사단은 미 제1군단 예비로 의정부 일대에 집결하고 있었다. 유엔군과 공산군은 1951년 11월 27일 회담에서 현 접촉선을 잠정 군사분계선으로 하기로 합의했다. 이에 따라 양측은 이 잠정 군사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면서 수색정찰과 소규모 국지 공격을 지속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유엔군은 주요 지역에서 국지적인 공격을 시행함으로써, 1952년 8월까지는 공격적인 입장에서 대체로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에 공산군은 휴전협상 타결에 대비하여 한 치의 땅이라도 더 확보하기 위해 적극적인 공세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1952년도 추계공세 계획에 따라 수도고지, 지형능선, 백마고지, 베티고지 등에서 제한된 국지적 공격을 실시함으로써 전 전선에서 치열한 고지쟁탈전이 전개되었다. 하지만 미 제3사단이 소속된 미 제1군단 지역은 휴전협상이 진행되는 판문점 지역에 포함되어 있어 전투행위는 다른 지역보다 훨씬 적었다. 사단은 부대정비를 하면서 교육훈련을 강화했다.
그러다 미 제3사단은 10월 중순에 연천으로 이동하여 연천 북동쪽의 방어진지를 인수했다. 이 무렵 양측은 전투전초 운용과 더불어 또 하나의 중요한 경계 수단으로서 수색정찰대를 운영하여 제한된 규모의 공세적인 전투정찰을 끊임없이 전개했다. 사단도 중대 또는 대대 규모의 전투정찰대를 편성하여 공산군 진지에 대한 위력수색과, 교란을 목적으로 한 국부적인 공격을 지속했다.
이 일병이 소속된 중대는 1952년 11월 11일 적진에 대한 전투정찰작전을 실시하다가 적과 조우하여 교전이 벌어젔다. 이 교전에서 이 일병은 앞장서서 용감하게 싸우다 적탄에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영만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전쟁기념관 전사자 명비(090-ㅍ-105)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