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영무(李永茂)
- 군별 : 육군
- 계급 : 병장
- 군번 : 3100560
- 전몰일자 : 19501226
공훈사항
이영무 병장은 서울특별시 용산구 신창동에서 출생했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으나 정치 및 사회적으로는 여전히 혼란스럽던 1949년 1월 27일, 서울 태능의 육사 교도대로 입대하여 기본 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조교로 보직되었다. 이후 제6사단이 1949년 2월 22일에 원주로 이동할 때, 사단 직할부대인 통신중대로 전속되었다.
북한군이 1950년 6월 25일에 기습남침을 했을 때, 제6사단 장병들은 체계적인 방어로 춘천-홍천 북방에서 3일간이나 저지하고 철수했다. 이후 북한군의 공격을 원주-충주-문경 축선에서 7월 한 달 동안 지연시키고, 낙동강방어선에 8월 및 9월 초순까지 격퇴시키고 반격작전으로 전환했다. 사단은 9월 16일부터 시작된 유엔군의 총반격작전에서 북한군을 추격하여 10월 5일에는 38선을 돌파했고, 계속 북진하여 19일에는 순천을, 23일에는 희천을 점령했다. 이영무 병장이 소속된 통신중대는 사단과 각 연대 및 직할부대 간의 통신소통을 지원했다.
제6사단은 10월 24일에 시작된 유엔군의 1차 총공세에 참가하여 희천에서 압록강 변의 벽동 및 초산 방향으로 진격했다. 선두부대는 10월 26일에 초산을 점령했으나, 이때 중공군은 이미 압록강을 건너 적유령 산맥 일대에 대기하다가 국군과 유엔군의 후방을 차단했다. 사단은 130km 되는 험준한 산길을 통해 차단선을 돌파하여 30일에 개천에 집결했다. 이후 11월 14일에 영원-덕천으로 이동하여 제2군단의 예비가 되었다.
제6사단은 11월 24일에 개시된 유엔군의 2차 총공세에 참가하여 공격했다. 중공군은 이번에도 은밀히 산속에 은거해 있다가 공격 2일차인 25일 야간부터 후방을 차단했다. 이에 당황한 유엔군은 평양을 거쳐 38선으로 철수를 단행했다. 12월 중순에 전곡-동두천 축선에 방어진지를 편성하여 차후 있을 중공군의 공격에 대비했다.
이영무 병장이 소속된 통신중대는 후방이 차단된 상황에서는 차단선을 돌파하여 후방으로 철수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고, 방어진지 편성 간에는 유무선 통신망을 개통하여 원활한 소통을 보장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는 통신소대의 일원으로서 사단과 연대 간의 통신선 점검을 수시로 실시하다가 12월 26일에 적 침투조의 기습공격을 받고 소탕작전 중에 적의 총탄에 맞아 애석하게도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영무 병장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33판-4면-017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42-ㅎ-074)에 그의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