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영생(李永生)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0335083
- 전몰일자 : 19500629(육군 제2훈련소가 창설된 이후인 1950-08-29로 조정함.)
공훈사항
이영생 일병은 경상북도 달성군에서 출생했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신생 대한민국과 자유를 지키기 위해 1950년 6월 9일 제3사단 제22연대에 입대했다.
1950년 6월 25일 6·25전쟁이 발발하자 제22연대는 서울로 이동하여 6월 27일 문산 축선을 방어하고 있던 제1사단에 배속되었다. 연대는 27일 봉일천전투에서 T-34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 제1사단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며 적의 남진을 지연했다. 이 전투에서 이 일병은 끝까지 진지를 지키며 용감하게 싸우다 부상을 입고 후송되었고, 8월 중순에 회복되어 부산에 있는 육군 제2훈련소 조교로 배치되었다.
한편, 개전 이래 수많은 전사자가 발생함에 따라 병력 보충문제가 가장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이에 신병교육을 위해 7월 11일 제25교육연대가 창설되었으나, 7월 17일 경북편성관구사령부 제7교육대로 개칭되었다. 8월 1일 이 교육대가 육군중앙훈련소로 개칭되었고, 8월 14일 육군본부 직할로서 대구에서 육군 제1훈련소로 재창설되었다. 같은 날 부산에서 제2훈련소가 제1·5교육대 병력과 제9교육대 일부 병력을 기간으로 창설되었다.
이 일병이 훈련소에 배치될 무렵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방어선에서 북한군의 8월 공세를 맞이하여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전개하고 있었고, 제2훈련소는 창설과 동시에 신병교육에 들어갔다. 8월 초순 낙동강 선으로 전선이 남하함에 따라 부산 지역에 대한 북한군 정찰대와 좌익 빨치산 세력들의 습격, 파괴활동이 더욱 극심해졌다. 당시 미군의 지원물자가 대부분 부산항을 통해서 들어오고 있었고, 부산에는 각종 지원부대와 시설 등이 밀집되어 있어 적 게릴라들의 공격 목표가 되고 있었다. 신병훈련소 또한 적의 공격 목표가 되었다.
전선 상황이 긴급했고 병력도 부족했기 때문에, 제2훈련소는 교관·조교를 비롯한 기간요원으로 기동타격대를 편성하여 게릴라들의 공격에 대응해 왔다. 8월 29일 적 게릴라들이 훈련소를 습격했고, 이 일병과 기동타격대원들은 이에 대응하여 전투에 투입되었다. 이 전투에서 이 일병은 용감하게 앞장서서 싸우다 중상을 입고 후송되었으나, 8월 29일 끝내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영생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13판-8면-077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80-ㅅ-026)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