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영서(李永瑞)
- 군별 : 경찰
- 계급 : 순경
- 군번 :
- 전몰일자 : 19530124
공훈사항
이영서 순경은 1919년 12월 15일 평북 용천군 양하리에서 출생했다. (경찰 입문 일자 미상). 그는 제주도 서귀포읍 중문동에서 전사했다.
육군본부는 초목이 무성한 녹음기가 되면 한라산지구의 공비토벌작전이 어려워질 것으로 예상하고 해빙과 동시에 공비들을 격멸하기 위해 1949년 3월 2일 제주도지구 전투사령부를 설치했다. 전투사령관은 효과적인 작전수행과 민·관·군 협조체제를 위해 민보단 1개 소대(25명)와 군인 1개 분대, 경찰 1개 분대로 구성된 민·관·군 혼성부대 수개 조를 편성했다. 민보단 소대는 도내 초·중학교 교사, 군청 직원, 청년단 간부들을 대상으로 1개월에 걸쳐 기초 군사훈련을 실시한 후 필요할 때마다 소집하여 소탕작전에 참여시켰다.
이 순경이 소속된 서귀포 경찰은 1950년 2월부터 6월까지 제주도에 주둔하고 있는 해병대와 합동으로 제1차 공비토벌작전을 실시했다. 1950년 2월 5일, 중문리와 서호리 북방 16km 지점에 있는 돌오름, 자연동굴, 950고지에서 공비들과 조우하면서 교전이 벌어져 다음 날까지 전투가 계속되었다. 이때 공비 8명을 사살하고 8명을 생포했다.
3월 15일, 해병대와 함께 작전을 실시하여 공비 2명을 사살하였고, 3월 22일에는 돌오름 서남방 500m 지점에서 공비 약 50명과 조우하면서 3시간의 교전 끝에 모두 격퇴하였다.
해병대와 경찰의 합동 공비토벌작전으로 공비들은 그들의 근거지인 한라산 서남방 지역에서 벗어나 한라산 중에서 가장 험준한 동남방 지역으로 이동했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12월부터 피난민이 제주도에 몰려들어 그 수가 증가하면서, 공비들은 종전의 소극적인 행동을 버리고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기 시작했다. 1951년 1월부터 4월까지 공비들의 출몰횟수는 점점 증가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해병대는 일부 병력을 제주도로 파견하였고, 1951년 1월 14일 제주도민의 뜻에 따라 제주도 군·경·민 합동전투지휘소를 설치하였다.
이리하여 제2차 공비토벌작전이 1951년 1월 17일부터 개시되었다. 이 시기 한라산의 공비는 약 80명으로 추정되었다. 공비들은 제주읍 남쪽 구릉지대에 출몰하여 남제주군 서귀포와 북방 서호리에 이르는 지역을 수시로 공격했다. 1월 27일, 군경부대는 한라산 동북방 어병생악에서 공비 20명을 발견하여 40분간 교전 끝에 3명을 사살했으며, 2월 10일에는 사라악과 명통암에서 공비들의 은거지를 기습하여 공비 15명을 사살했다. 2월 22일에는 북악 부근에서 공비 40명과 조우하면서 교전이 벌어져 5명을 사살했다.
1952년 1월 24일, 이 순경은 서귀포 중문동에서 휘하의 병력을 지휘하여 공비토벌작전을 수행하던 중 적탄에 맞아 장렬하게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영서 순경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전쟁기념관 전사자 명비(100-ㅊ-044)에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