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영석(李英碩)

  • 군별 : 육군
  • 계급 : 이등중사
  • 군번 : 0100262
  • 전몰일자 : 19510212

공훈사항

이영석 이등중사는 경상북도 대구시 동인동에서 출생했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6·25전쟁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나라를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1950년 8월 30일 대구에 있는 제1훈련소에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받고 제7사단 제3연대에 배치되었다.
이 이등중사가 부대에 배치될 무렵 유엔군은 낙동강방어선에서 북한군 9월 공세를 맞아 치열한 공방전을 하고 있었고, 제7사단은 경주 부근의 무릉산 일대에서 적과 공방 중이었다. 사단은 이곳에서 9월 13일까지 혈전을 거듭한 끝에 적의 최후 공세를 물리치고 반격작전의 발판을 마련했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함에 따라 국군은 9월 22일부로 추격작전으로 전환했다. 사단은 제8사단을 후속하여 경주-안동-문경-충주-장호원을 거쳐 10월 8일 양문리에서 38도선을 돌파했고, 김화-평강-곡산-평양 북방-개천을 거쳐 11월 1일 군우리까지 진출했다. 이 무렵 중공군 제38군은 청천강 이북의 국군과 유엔군을 포위하고, 북상하는 아군 증원부대를 차단하려 했다. 이에 사단은 군우리 북방의 비호산 일대를 점령하여 방어태세에 들어갔다. 3일 연대는 중공군 제112사단의 공격을 받았고, 연대 장병들은 7일까지 고지를 뺏고 뺏기는 치열한 공방전을 벌인 끝에 적을 격퇴하고 비호산을 지켜냈다.
11월 14일 연대는 덕천으로 진격했고, 유엔군의 크리스마스 공세계획에 따라 11월 22일 묘향산으로 공격을 개시했다. 그러나 연대는 26일 묘향산 남방에서 중공군 제38군과 제42군의 강력한 반격을 받고 악전고투 끝에 27일 순천 일대로 철수했다. 연대는 미 제8군 철수계획에 따라 12월 3일 승호리 일대로, 6일 신계를 거쳐 시변리로 철수했고, 계속해서 연천을 거쳐 12월 15일 춘천으로 단계적으로 철수하여 춘천 동북방의 38도선 일대에서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12월 31일 중공군은 제3차 공세를 시작했고, 연대는 북한군 제10사단의 집중 공격을 받고 횡성 북방으로 철수했다. 이 무렵 북한군 제2군단이 영월로 진출함에 따라 연대는 1951년 1월 19일 만경대산을 공격하여 이를 점령하고, 20일 영월 탈환의 관건이었던 응봉산을 점령했다. 연대는 24일 영월을 탈환하고 퇴각하는 적을 섬멸했다.
2월 11일 개시된 중공군 제4차 공세(2월 공세) 때, 연대는 북한군 제2군단의 집중 공격을 받고 평창 일대를 내주고 후방으로 후퇴했다. 이 전투에서 이 이등중사는 소대원을 이끌고 진두에서 용감히 싸우다 적탄에 맞아 2월 12일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영석 이등중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려 위패(23판-7면-3693호)를 국립대전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51-ㄹ-086)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