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김비야 (金備也)

  • 군별 : 육군
  • 계급 : 하사
  • 군번 : 9270972
  • 전몰일자 : 1953-06-13

공훈사항

김비야 하사는 1931년 10월 12일 전라북도 고창군 흥덕면에서 출생하여, 1952년 12월 11일 육군에 입대한 후 제5사단에서 복무하였다.
제5사단은 1948년 4월 29일 전라남도 광주에서 제3, 제4, 제9연대를 기간으로 창설된 제5여단을 모체로 하여, 다음 해인 1949년 5월 12일 사단으로 승격하였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전면 남침하자 사단은 서울 서북방의 봉일천과 미아리 북방의 창동에 투입되어 적을 저지하였다. 이어 사단은 38도선으로부터 철수하면서 지연전을 전개하던 제1사단과 제7사단을 증원해 지연작전을 전개하고 6월 28일 한강 이남으로 철수, 한강선 방어작전을 수행하였다. 7월 1일부터 오류동-시흥지역에서 지연전을 수행하던 사단은 대부분의 병력이 분산되자 7월 17일 육군 재편성계획에 따라 경상남도 마산에서 해체되었다.
북진작전기인 1950년 10월 8일 사단은 국일명 제86호에 의거 대구에서 재창설되어 경인지구 계엄사령관이었던 민기식 대령이 제7대 사단장으로 부임하였으며, 예하에 대구주둔 제27연대와 마산주둔 제35연대 그리고 부산주둔 제36연대를 두었다. 사단은 재창설 직후 포항(제27연대), 지리산(제35연대), 김천 및 영주지역(제36연대)에서 공비 토벌작전을 수행하고 38도선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1951년 1월 1일 홍천-원주-영주 일대로 철수한 사단은 2월 초 미 제10군단의 ‘라운드-업 작전’의 우일선 사단으로 2월 5일부터 12일까지 횡성북방지구 전투를 실시하여 2,100여 명을 사살하는 대전과를 거두었으며, 중공군의 2월 공세로 횡성 우측방 포동리에서 새말-주천-단양으로 이동해 단양-풍기간의 보급로 경계 및 부대정비를 실시하였다. 사단은 5월의 중공군 제5차 2단계 춘계공세 시까지 태기산지구 전투와 하안흥지구 전투, 홍천 서석지구 전투, 소양강지구 전투, 인제지구 전투 등을 전개하여 소양강 남안 음양리-어론리의 미조리 선까지 진격하였으나, 중공군의 강력한 공세로 풍암리로 철수한 뒤 원통리, 어론리, 서화리 등 중부전선에서 공방전을 전개하였다. 사단은 주저항선 전방의 전초진지를 확보하기 위해 1951년 8월 18일부터 28일까지 양구 북방의 피의 능선에서 북한군 2개 사단을 공격하여 목표를 점령하였으며, 9월 4일부터는 가칠봉을 공격하여 적 제27사단을 격퇴하고 펀치볼 북서쪽의 주요 고지를 점령하였다.
1952년 1월 10일 동해안 거진으로 진출한 사단은 7월 1일부터 10일까지 북한군 제47사단과 동해안지구 전투를 수행하였고, 이어 7월 10일부터 14일까지 북한군 제9사단과 351고지 점령을 위한 2차에 걸친 공방전을 전개하였다. 사단은 1953년 4월 10일 강원 화천지구로 이동하여 제3사단의 작전지역을 인수하였고, 5월 12일부터 텍사스고지, 883고지, 973고지, 949고지와 백암산 등에서 고지쟁탈전을 수행하고 휴전에 임하였다.
김비야 하사는 949고지 쟁탈전에 참가하여 용전분투하였으나, 1953년 6월 13일 적의 흉탄을 맞고 장렬히 전사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살신보국정신(殺身保國精神)을 선양하고 후세에 교훈으로 남기기 위하여 국립현충원(國立顯忠院, 38-2-063)에 봉안하고 전쟁기념관 전사자 명비(036-ㄷ-004)에 그 이름을 새겨 추모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