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김사문 (金士文)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등병
  • 군번 : 0629393
  • 전몰일자 : 1951-10-27

공훈사항

김사문 일등병은 1930년 10월 18일 전라남도 순천군 주암면 복다리에서 출생하여, 1951년 7월 20일 육군에 입대한 후 제8사단에서 복무하였다.
제8사단은 강릉 일대에서 38선 방어와 해안선 경계임무를 수행하던 중 전쟁이 발발하자 1950년 6월 25일부터 7월 1일까지 강릉지역에서 동해안을 따라 남하하는 북한군 제5사단과, 정동진 해안으로 상륙하여 남으로부터 협공을 가하는 북한군 제945육전대 및 임원진으로 침투한 제766부대 등 2개 사단 규모의 적을 맞아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하였다. 이후 사단은 축차적인 철수작전을 전개한 후 낙동강 방어선을 형성하였다. 이 과정에서 사단은 6월 29일부터 7월 12일까지 제천 및 단양지역에서, 7월 14일부터 22일까지 풍기지구에서, 7월 23일부터 28일까지 옹천에서, 그리고 7월 29일부터 31일까지 안동지구에서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하였다. 8월 1일 안동에서 철수하여 낙동강을 건너 의성에 도착한 사단은 8월 3일부터 의성지구전투, 9월 2일부터 12일까지 영천전투를 실시하여 적을 격퇴하였다.
1950년 9월 20일 반격으로 전환한 사단은 단양-동두천을 거쳐 10월 8일 초성리에서 38선을 돌파하고 9일 연천, 10일 철원, 11일 평강, 13일 이천을 점령하고, 14일 곡산으로 진격하여 18일 평양 동북 강동을 점령하였다.
평양을 탈환한 후 맥아더 장군이 국경선으로 총공격 명령을 하달하자, 사단은 10월 23일 덕천을 탈환하고, 24일 희천-강계 축선으로 진격을 개시하여 25일 구장동을 점령하였으나, 10월 25일 중공군의 제1차공세로 희천으로의 진격을 중지하고 구장동에서 중공군의 진격을 저지하고자 하였다.
11월 25일 개시된 중공군의 제2차 공세기간 중 사단은 평남 덕천 및 영원 지역에서 중공군 제42군의 공격을 받고 방어전투를 전개한 후 철수하였다.
춘천 부근에 있는 아군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하여 북한군이 12월 23일 홍천 방면으로 먼저 공격을 개시하자 치열한 전투 끝에 이를 격퇴하였으나, 잇따라 12월 31일 중공군의 신정공세가 전개되자 아군은 철수하여 1951년 1월 5일 원주-삼척간의 방어선을 점령하였다. 미 제10군단으로 배속이 전환된 사단은 원주에서 홍천 방면으로 반격을 실시하던 중 1951년 2월 4일부터 15일까지 횡성 북쪽에서 중공군 제40군 및 제66군과 치열한 전투 끝에 막대한 피해를 입고 대구로 철수하여 재편성한 후 4월부터 5월까지 후방지역의 패잔병 및 공비 토벌임무를 수행하였다.
1951년 7월 사단은 원통 서화리 북쪽 노전평 지구의 제5사단 작전지역을 인수하고, 8월부터 10월까지 3차에 걸친 노전평지구 전투와 백석산(양구 방산) 전투를 실시하여 785고지, 1031고지, 965고지, 854고지와 백석산을 점령하는 대대적인 전과를 거두었다. 특히 10월 6일부터 28일까지의 양구 북쪽에 있는 문등리 서남방지구 전투에서는 1,471명을 사살하고 103명을 포로로 하였다.
김사문 일등병은 양구 북방의 문등리 서남방지구 전투에 참가하여 용감히 싸우다가, 1951년 10월 27일 적의 흉탄을 맞고 장렬히 전사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살신보국정신(殺身保國精神)을 선양하고 후세에 교훈으로 남기기 위하여 국립현충원(國立顯忠院, 25-5-114)에 봉안하고, 전쟁기념관 전사자 명비(063-ㄲ-024)에 그 이름을 새겨 추모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