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김상도(金相道)

  • 군별 : 육군
  • 계급 : 하사
  • 군번 : 9236381
  • 전몰일자 : 1953-06-15

공훈사항

김상도 하사는 1928년 4월 4일 경상남도 합천군 쌍책면 사양리에서 출생하여, 1952년 8월 31일 육군에 입대한 후 제5사단 36연대에서 복무하였다.
전쟁 발발 이전 제5사단은 예하의 제15연대를 전주에, 제20연대를 광주에 각각 주둔시켜 공비토벌작전을 수행하면서 부대정비와 교육훈련을 실시하였으며,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전면 남침하자 서울 서북방의 봉일천에 있는 제1사단과, 미아리 북방의 창동에 있는 제7사단에 병력을 증원하여 지연전을 수행하다가 6월 28일 한강 이남으로 철수하여 한강선 방어작전을 수행하였다. 7월 1일부터 오류동-시흥지역에서 지연전을 수행하던 사단은 병력이 분산되자 7월 17일 육군 재편성계획에 따라 경상남도 마산에서 해체되었다.
북진작전기인 1950년 10월 8일 사단은 국일명 제86호에 의거 대구에서 재창설되어 경인지구 계엄사령관이었던 민기식 대령이 제7대 사단장으로 부임하였으며, 예하에 대구주둔 제27연대와 마산주둔 제35연대 그리고 부산주둔 제36연대를 두었다. 사단은 10월 16일부터 11월 17일까지 제3군단에 배속되어 포항(제27연대), 지리산(제35연대), 김천 및 영주지역(제36연대)에서 공비 토벌작전을 수행하였다.
사단은 11월 23일 제3군단으로부터 육본으로 배속이 변경되어 12월 3일까지 가평, 청평, 춘천 지구 38선 경비임무를 수행하였다. 이어 사단은 중공군의 신정공세에 지연전을 전개하면서 1951년 1월 3일 원주로 철수하였다. 사단은 2월 초 미 제10군단의 ‘라운드업 작전’의 우일선 사단으로 2월 5일부터 12일까지 횡성북방지구 전투를 실시하여 2,100여 명을 사살하는 대전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중공군의 제4차 공세(2. 11~15)로 사단은 횡성 우측방 포동리에서 새말-주천-단양으로 이동하여 단양-풍기간의 병참선 경계 및 부대정비를 실시하였다. 중공군의 제5차 1단계 춘계공세(4. 22~30)가 끝나자, 사단은 5월 7일 미 제10군단에 배속되어 미주리 선을 공격하여 어론리 북쪽의 고지군으로 진출한 후 방어로 전환하였다. 그러나 중공군의 2단계 춘계공세(5. 16~22)로 사단은 어론리로 철수한 뒤 장평리 일대에서 격전을 벌인 결과 중공군의 진격을 저지할 수 있었다.
사단은 주저항선 전방의 전초진지를 확보하기 위해 8월 18일부터 28일까지 양구 북방의 피의 능선에서 북한군 2개 사단을 공격하여 목표를 점령하였으며, 9월 4일부터는 가칠봉을 공격하여 적 제27사단을 격퇴하고 펀치볼 북서쪽의 주요 고지를 점령하였다. 1952년 1월 10일 동해안 거진으로 진출한 사단은 7월 1일부터 10일까지 북한군 제47사단과 동해안지구 전투를 수행하였고, 이어 7월 10일부터 14일까지 북한군 제9사단과 351고지 점령을 위한 2차에 걸친 공방전을 전개하였다.
사단은 1953년 4월 10일 강원 화천지구로 이동하여 제3사단의 작전지역을 인수하였고, 5월 12일부터 텍사스고지, 883고지, 973고지, 949고지와 백암산 등에서 고지쟁탈전을 수행하고 휴전에 들어갔다.
김상도 하사는 1953년 6월 15일, 화천 북방의 973고지 전투에 참가하여 용감히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살신보국정신(殺身保國精神)을 선양하고 후세에 교훈으로 남기기 위하여 국립현충원(國立顯忠院, 37-7-254)에 봉안하고, 전쟁기념관 전사자 명비(036-ㅌ-015)에 그 이름을 새겨 추모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