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김사봉 (金四烽)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등병
  • 군번 : 0320212
  • 전몰일자 : 1951-01-04

공훈사항


김사봉 일등병은 경기도 가평군 가평읍 마장리에서 출생하여(생년월일 미상), 육군에 입대한 후(입대일자 미상) 제6사단에서 복무하였다.
전쟁 발발 전 원주에 사령부를 둔 제6사단은 제7연대와 제2연대를 춘천과 홍천 동북지역에 각각 배치해 38선 경비임무를 수행하였고, 예비인 제19연대는 원주에 집결보유하고 있었다.
사단은 1950년 6ㆍ25전쟁이 발발하자 예비인 제19연대를 즉각 춘천으로 투입하여 춘천과 홍천 지구에서 6월 30일까지 북한군 제2사단과 제12사단의 남하를 성공적으로 저지하였고, 육군본부의 명령에 따라 횡성-충주로 철수하면서 지연전을 전개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사단의 축차적인 저항에 부딪친 북한군은 자주포를 포함한 많은 인원 및 장비의 손실을 입고 춘천-홍천 축선으로의 진출이 지연되어 우회기동하여 수도권을 포위하려던 적의 작전계획에 큰 차질이 생겼다.
국군의 한강방어선이 붕괴된 후인 1950년 7월 5일부터 11일까지 사단(-)은 충주에서 남하하는 적을 저지하였고, 예하 7연대는 음성 지구에서 적의 선두부대인 제15사단 제48연대를 궤멸시키는 대전과를 거둠으로써 제7연대 전 장병이 일 계급 특진하는 영예를 획득하였다. 이어서 수안보를 거쳐 남하한 사단은 이화령 전투(7. 14)와 문경 전투(7. 16)에서는 적 제1사단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해 상주로의 진출을 저지하였고, 7월 19일부터 31일까지 함창-점촌 북쪽에 있는 옥녀봉과 조봉 일대에서 북한군 제1사단 및 제13사단과 치열한 전투를 실시한 후, 낙동강 방어선으로 철수하였다.
사단은 의성-군위-의흥 선에서 약 1개월에 걸친 공방전을 벌인 후, 1950년 8월 30일 영천 북방의 신녕지구에서 마지막 공세를 통해 아군 제8사단의 방어선을 돌파해 영천 동측방으로 진출하려던 적 제8사단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방어하였다.
1950년 9월 16일부터 반격작전으로 전환한 사단은 충주-원주를 거쳐 10월 3일 춘천을 탈환하고 38선을 돌파하였다. 사단은 화천(10. 8)-김화(10. 10)-원산을 거쳐 19일 성천을 점령한 후 20일 순천에서 미 공수부대와 연결하였다. 사단은 계속 북진하여 21일 개천, 22일 영변과 구장동, 23일 희천, 24일 온정리를 점령하고, 고장을 거쳐 한ㆍ만 국경으로 진격하여 10월 26일 7연대가 초산을 점령한 후 압록강변에서 역사적인 태극기 게양식을 거행하였다. 그러나 10월 25일 중공군의 제1차공세가 개시되자 2연대는 온정리에서 철수하고, 7연대는 10월 29일 초산으로부터 철수하여 11월 6일 청천강 남쪽 개천에 도착하였다.
11월 24일 크리스마스공세 무렵 사단은 덕천으로 이동하였으나 11월 25일 개시된 중공군의 2차 공세에 밀려 순천으로 철수한 후 12월 6일에는 평양 남쪽 수안-곡산 선에서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12월 12일에는 동두천에 도착하여 38선 방어진지를 구축하였으나, 12월 31일 중공군의 신정공세로 1951년 1월 7일 안성-장호원 선까지 후퇴하였다.
김사봉 일등병은 1951년 1월 4일, 중공군의 신정공세에 맞서 용감히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살신보국정신(殺身保國精神)을 선양하고 후세에 교훈으로 남기기 위하여 국립현충원(國立顯忠院, 07-4-095)에 봉안하고, 전쟁기념관 전사자 명비(043-ㅈ-008)에 그 이름을 새겨 추모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