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김상동(한자미상)
- 군별 : 육군
- 계급 : 이등중사
- 군번 : K1134917
- 전몰일자 : 1951-03-03
공훈사항
김상동 이등중사는 경상북도 경산군에서 출생하여(생년월일 미상), 1950년 9월 20일 육군에 입대한 후 미8군지원한국군으로 복무하였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전 전선에서 일제히 38선을 돌파하여 남침을 개시하자, 전차를 동반한 우세한 북한군을 맞아 아군은 열세한 병력으로 용전분투하였으나 전 전선에서 밀려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한국군 단독으로는 북한군의 공격을 저지할 수 없다고 판단한 맥아더 장군은 미 지상군을 한국에 파견하였다. 6ㆍ25전쟁에 미군으로서 최초로 투입된 스미스 특수임무부대가 7월 5일 평택 북쪽 죽미령에서 북한군에게 궤멸된 이후, 7월 19일에는 대전 전투에서 미 제24사단이 패배함으로써 7월 말에는 전 미군부대가 낙동강 방어선으로 철수하게 되었다.
북한군은 낙동강 방어선을 돌파하고 남한 전지역을 석권하고자 최후의 발악적인 공격을 감행함으로써 낙동강 방어선 전 전선에서는 일진일퇴의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미군은 철수작전 과정에서 또 낙동강 방어선 전투에서 많은 병력이 손실되어 각 전투부대들은 병력이 절대 부족한 상황이었으나 미 본토로부터의 보충병은 신속히 도착할 전망이 없었다. 이에 미8군사령부에서는 8월 초순부터 예하의 전투부대에 중대 당 100여 명의 한국군을 배치하여 병력보충을 실시하였다.
그 후 1950년 8월 15일부터는 유엔군사령관의 명령에 의해 한국군이 미 지상군에 보충되면서 카투사(KATUSA) 제도가 시행되었고, 이들은 한국의 지형과 기후에 익숙하지 못한 미군에게 많은 도움을 주어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게 하였다.
김상동 이등중사는 국군과 유엔군이 38선을 향해 재반격 중에 있던 1951년 3월 3일, 미군과 함께 공격작전에 참가하여 카투사의 임무를 훌륭히 수행하다가 적의 흉탄을 맞고 장렬히 전사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살신보국정신(殺身保國精神)을 선양하고 후세에 교훈으로 남기기 위하여 국립현충원(國立顯忠院, 23-5-2089)에 봉안하고 영령을 추모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