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김상동(金相同)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등병
- 군번 : 0329889
- 전몰일자 : 1951-06-17
공훈사항
김상동 일등병은 전라북도 금산군 진산면에서 출생하여(생년월일 미상), 육군에 입대한 후 제7사단에서 복무하였다.
1950년 6ㆍ25전쟁이 발발하자 제7사단은 동두천 부근의 보산리까지 추진되어 준비된 진지에서 적 1개 대대를 집중포격으로 격멸하는 등 6월 25일부터 27일까지 의정부와 창동지구에서 적과 치열한 교전을 벌였으나, 전차를 동반한 우세한 적의 집중공격에 분산되어 철수하였다.
사단은 한강선 방어전투와 시흥지구 전투를 수행한 후, 1950년 7월 5일 해체되었다가, 8월 20일 국일명 제49호에 의거 대구에서 제3, 5, 8연대를 기간으로 재편성되어 8월 21일부터 30일까지 의흥지구 방어전투, 이어 9월 4일부터 13일까지 영천지구 전투를 전개하였다. 이 전투에서 사단은 북한군 제8, 제15사단을 맞아 불리한 전세를 만회하고 반격의 계기를 마련함으로써 대통령 부대표창을 받았다.
9월 16일 제1차 반격작전 지시를 받은 사단은 경주-안동으로 이동한 후, 북진하여 양평(10.1)-포천, 양문리(10.8)-평강(10.12)-평남, 상동(10.19)을 탈환하였고, 10월 20일에는 예하 제8연대가 대동강을 도하하여 평양에 입성하였다. 사단은 북진을 계속하여 11월 3일 구장동까지 진출했으나, 6ㆍ25전쟁에 개입한 중공군의 제1차 공세로 청천강 남안으로 철수하여 11월 5일부터 18일까지 청천강에서 방어작전을 실시하였다. 11월 24일 유엔군의 크리스마스 공세에 이은 11월 25일의 중공군의 제2차 공세로 인하여 11월 24일부터 27일까지 덕천지구에서 전투를 전개한 사단은 철수하여 홍천에서 정비한 후 12월 15일 춘천으로 이동하였다.
12월 31일 중공군의 제3차 공세가 개시되자 사단은 춘천에서 홍천-횡성-원주를 거쳐 1951년 1월 7일에는 신림리에서 영월로 이동 중 적과 격전을 치르고, 1월 8일 영월 동남쪽에서 방어진지를 편성하였다.
1951년 2월 5일 개시된 라운드업 작전에서 사단은 평창에서 공격을 개시하여 창동리 남쪽까지 진격하였으나 2월 11일 개시된 중공군의 제4차 공세에 밀려 18일에는 영월까지 철수하였다. 킬러작전(2. 21~3. 6)에 참가한 사단은 2월 21일 영월에서 공격을 개시하여 평창을 거쳐 3월 초 창동리까지 진격하였다. 사단은 군단예비로 후방에서 공비소탕작전을 펼치다가 4월 22일 인제 원통지역으로 투입되어 제5사단의 작전지역을 인수한 후 중공군의 제5차 1단계 춘계공세에 철수하였다가, 다시 반격작전을 벌여 인제 남쪽 신풍리-남전리까지 진격하여 소양강에서 방어진지를 편성하였다. 사단은 5월 16일 개시된 중공군의 제5차 2단계 춘계공세에 맞서 춘천 및 소양강지구에서 중공군 및 북한군과 격전을 벌이다가 철수하였다.
다시 반격한 사단은 미 해병사단으로부터 화천저수지 남안 진지를 인수하고 6월 8일부터 757고지 탈환을 위한 화천지구 전투와 901고지 탈환을 위한 양구군 방산면 송현리지구 전투를 전개하여 고지를 탈환하는 전공을 세웠다.
김상동 일등병은 1951년 6월 17일, 화천지구전투에서 적과 교전 중에 장렬히 전사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살신보국정신(殺身保國精神)을 선양하고 후세에 교훈으로 남기기 위하여 국립현충원(國立顯忠院, 11-5-242)에 봉안하고, 전쟁기념관 전사자 명비(052-ㄱ-095)에 그 이름을 새겨 추모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