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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10 16:5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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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관리자
제목 : [국방일보]기획-국난극복사<63>조선 지식인의 해방(海防) 논의

<63>조선 지식인의 해방(海防) 논의
조선 사회, 경계의식만 드러낼 뿐 방어대책 수립하지 못해 / 2012.08.08


다산 정약용 사진
전라남도 강진군 도암면 소재의 다산 초당사진 한국학 디지털 아카이브 제공

19세기 중엽 서양 세력의 출현이 빈번해지자 조선 사회에 위기의식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대외관계에 근본적인 전환이 필요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여전히 ‘해금(海禁)’ ‘변금(邊禁)’을 유지하며 사사로이 외국과 교섭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고수했다. 변화가 그만큼 지체되고 있었다.

▶이양선의 출현과 조선 지식인의 대외인식

 18세기 후반 이미 수군의 방어선을 강화하거나 전선의 개량과 같은 문제가 논의된 바 있었다. 청국을 가상적국으로 상정하고 해상에서 적을 곧바로 섬멸할 수 있는 ‘삼선방어망(三線防禦網)’의 개념도 등장했다.

그러나 서양 세력의 위협에 관해서는 이덕무나 정약용 같은 일부의 식자들의 관심사에 지나지 않았다.

 당시 다산은 근대의 전쟁 양상에 대해 이해하기 시작했고, 서양의 침략적 본질에 대해서도 간파했다. 그는 말했다. “서양의 풍속은 오로지 상업으로 본업을 삼아 사해를 주류하면서 배를 집으로 삼는다. … 그들의 풍속이 사나워 화포와 예리한 병기로 자기들을 호위하여 외적을 막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또한 침략과 살인의 지목을 받게 되는 것이다.”

정약용은 서양 세력의 침략적인 성격을 정확하게 꿰뚫고 미래의 새로운 위협을 내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 말에 귀 기울이는 이는 많지 않았다.

▶한 권의 책과 새로운 사고

 아편전쟁(1840~1842)이 끝난 직후 한 권의 중국 서적이 조선에 소개됐다. ‘해국도지’다. 양무론자인 저자 위원(魏源)은 서양의 무력침공에 대해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을 제시한 임칙서(林則徐)와 함께 주목할 만한 견해를 내놓았다. 서양의 해양 침략을 막으려면 내하(內河)를 접적지역으로 삼아 각 성(省)의 토병(土兵)을 활용해 자전자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조선인들의 반응은 냉랭했다.

 북경 함락 소식이 조선에 전해진 직후인 1861년 초 윤섭과 박주운이라는 사람이 다시 이양선에 대처하는 방안을 제기했다. 둘 다 우리의 장점인 험준한 지세를 최대한 이용해 서양의 장점인 뛰어난 대포나 함선을 무력화시켜야 한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조선에 불리한 수전(水戰)을 피하고 육전(陸戰)을 유도해 전통적인 거험청야전술(據險淸野戰術)의 지구전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처음에는 소극적이던 조선 사회에서 해방에 관한 문제가 점차 조야의 관심거리가 돼 갔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민보를 설치해 운영하자는 식으로 이해됐고 결국 전통적인 전술을 강조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간주했다. 그렇기에 조선 사회는 개항 직전에는 서양 세력에 대한 경계의식만을 드러냈을 뿐 군사적인 방어대책을 수립하지 않았다. 여전히 서양에 관한 인식적 차원에서의 담론을 제시하는 데 머물렀던 것이다.

▶군사개혁과 해방론의 현실화

 해방 문제가 군사개혁 차원에서 검토된 것은 대원군과 고종의 군사적 개혁 때부터다. 신헌은 대원군의 명을 받들어 군제개혁에 나섰다. 그 무렵 1866년 8월 프랑스 선박이 한강의 양화진까지 침입하는 사태가 벌어지자 총융사의 신헌(1811~1884)을 대신해 강화도 현지를 직접 찾아간 강위가 해방대책을 제시했다.

 그가 제시한 해방 책략은 정약용이 제시한 방안과 마찬가지로 서양 세력에 대한 ‘양이적(攘夷的) 방어책’으로서 민보론을 계승하는 한편, 위원의 방어책을 채용해 서양 세력을 막는다는 방어개념이었다. 전술적으로는 바다로부터 침입해오는 적을 내하 깊숙이 끌어들여 격파하는 강방책(江防策)이었고, 강화도 방어시설의 강화와 전력의 조정, 그리고 무기 및 장비의 개량과 제조 등과 같은 군사력의 증강이 골자였다.

 이후 조선의 해방론은 박규수와 양헌수 등 서양 세력과 직접 무력충돌을 경험한 군사 실무자들에 의해 더욱 구체화됐다. 연암의 손자인 박규수(1807~1876)는 중국에 가서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침략상을 직접 목도하고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 호가 침공할 당시 직접 평양 군민을 지휘한 인물이다. 그는 1866년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 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에 침입했을 때 평양 군민에게 상선을 공격하도록 해 침몰시켰다. 해외 사정에 밝은 그의 대외인식은 동도서기론적(東道西器論的) 개화사상의 단초가 됐다.

 양헌수(1816~1888) 또한 천주교 박해인 병인박해를 빌미로 중국의 산동 반도의 즈푸 항에 있던 프랑스 극동함대사령부의 로즈 제독의 함대가 침공한 병인양요에서 여지없이 그의 해방책의 수월성을 발휘했다. 그는 자신의 실전 경험을 살려 해방책을 포괄하는 어융방략(禦戎方略)을 제시하기도 했다. 실로 서양의 무력에 맞서서 제시한 용감한 조선인들의 고심의 산물이었다.

▶양요 전후 해방책의 한계

 양요를 계기로 조선의 해방 대책은 종전보다는 적극적인 대응에 무게가 실렸다.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수비에 의존한 ‘지구전전략’과 ‘무력충돌회피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해방(海防)보다 사실상 강방(江防)에 중점을 둔 임기응변의 미봉책이었다. 결과적으로 당시의 해방 대책은 ‘부국강병’의 창으로서 역할과 전망을 제공하지 못했던 셈이다.

<백기인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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