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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9.11 16: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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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관리자
제목 : [국방일보]기획-국난극복사<64>‘쇄국 조선’과 미국의 첫 만남

<64>‘쇄국 조선’과 미국의 첫 만남
‘무장 군함’ 앞세워 평양 대동강서 통상 시위// 2012.08.22  

美, 셔먼호 격침 빌미 개항·통상 체결 요구

환재 박규수 사진


제너럴셔먼호 사진

1860년대 들어와 조선의 개항을 요구하는 물결이 거세졌다. 조정에서는 국법을 들어 이양선의 요구는 배격했지만 부족한 물품은 선의로 넉넉히 공급해준다는 원칙을 고수했다. 그런 와중에 조선과 미국이 처음으로 접촉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제너럴셔먼호가 평양에 나타나다

 1866년 7월 6일(양 8. 15.) 미국의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평안도 용강현에 나타났다. 셔먼호는 10여 일이 지나자 평양부로 접근해 정박했다. 평안감사 박규수는 장계를 올려 “교역 두 글자는 감히 논할 수 없어 가로막았더니, 무례하기 짝이 없는 교활한 오랑캐가 끝내 배를 돌리지 않고 머물거나 옮겨 다녀 실로 고민스럽다”며 고충을 토로했다.

 사실 셔먼호가 대동강에 무단으로 들어온 것은 명백한 영토 침략이자 주권 침해였다. 상선이라지만 실제로 무장한 군함이었다. 통상관계는 지방관의 마음대로 허락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표류선처럼 고의적으로 국경을 넘나드는 것이 아닐 때는 최대한 관용을 베풀어 식수와 연료를 제공해 주지만 통상은 결코 허용할 수 없다는 방침으로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조치에 불과했다.

 박규수는 셔먼호 측의 제의에 대해 ‘통상불가’의 원칙을 고수하며 통상관계 수립을 거부했다. 다만 셔먼호 측의 적대적인 행동이 없었기 때문에 푸짐한 음식물을 세 번씩이나 제공해줬다. 하지만 장맛비가 걷히고 대동강의 수량이 줄자 셔먼호는 음식물을 약탈하는 등 해적선으로 변모했다. 게다가 이현익(李玄益)마저 납치하니 평양군민들은 “우리 중군을 석방하라”며 분개했다.

 ▶조선군, 제너럴셔먼호를 공격하다

 7월 22일 오후부터 박규수는 대동강변에 나와 앉아 겸중군 백낙연과 서윤 신태정을 독려하며 “포격이나 화공으로” 셔먼호를 섬멸하고자 했다. 일단 포격으로 적 1명을 쏘아 죽이는 전과를 올렸으나 화공은 실패했다. 셔먼호 측이 밧줄로 엮은 그물을 교묘히 설치해 화선(火船)의 접근을 막았기 때문이다. 그날 종일의 전투로 셔먼호는 탄약이 거의 다 떨어졌고 얕은 여울에 좌초됐다. 박규수는 아군 전력이 열세하지만 분격한 군민들을 잘 지휘한다면 승산이 있으리라고 판단했다.

 이튿날인 7월 23일에도 셔먼호는 원래 정박한 곳에서 멈춰 대완구와 조총을 쏘아댔다. 그러다가 셔먼호가 하류로 물러나자 박규수는 다시 한번 화공작전을 계획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7월 24일 조금씩 떠내려 온 셔먼호가 얕은 여울인 양각도와 쑥섬 사이의 구진강(대동강 동남편 지류)에서 멈춰 섰다. 백낙연과 신태정은 총수와 사수를 징발해 강 아래 여러 곳을 차단했다. 적들이 배에서 탈출해 하륙할 경우에 대비한 것이다.

 정오 무렵 셔먼호에서 대포와 총을 발사해 조선군 1명이 피살되자 성안의 온 백성들이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공격에 나섰다. 땔감을 실은 화선들이 일제히 셔먼호를 공략하며 방화했다. 드디어 불이 옮겨 붙었다. 순간 셔먼호의 선체에 저장한 화약이 터지면서 검은 화염이 솟구쳤다. 인명 피해가 컸다. 미국인 토머스 목사와 중국인 자오링펑 등이 살해됐고 화염으로 2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셔먼호는 기계와 집물이 함께 불탔고 종선 1척도 소각됐다. 뒷날 그 잔해들이 노량진에서 군선을 개량하는 데 이용됐다.

 ▶조선 정부의 사후 처리

 셔먼호를 격침하고 일당을 섬멸했다는 박규수의 장계가 7월 27일 조정에 도착했다. 승전보를 접한 왕은 평안감사 박규수에게 포상했다. 겸중군 철산부사 백낙연에게도 포상하고 그를 영장으로 승진시켰다. 평양 서윤 신태정에게는 한 번 더 연임하게 했다. 세 사람에게는 옥새를 찍은 유서와 비단 옷감이 하사됐다. 사태가 일단락된 후, 8월 3일 전국에 척사윤음이 선포됐다. 국왕은 사교가 횡행하는 것은 정학(正學)이 밝지 못한 탓이라면서 “사람들은 성리학 서적을 낭송하고, 선비들은 공맹의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고 강조했다.

 제너럴셔먼호에 대해 박규수가 강공으로 맞선 것은 자신의 의지나 판단이기에 앞서 조선 정부의 의지였다. 그의 대외관과도 차이가 있는 조치인 것은 사실이다. 평소 그는 군사력이 우세한 서양 세력과는 가급적 무력충돌을 피해 개전(開戰)의 구실을 주지 말아야 한다면서 서양 침략에 맞서는 전(戰)보다 수(守)의 전략을 강조했다. 그러나 셔먼호 측의 도발이 계속되자 단호하게 섬멸 결정을 내렸다. 국왕도 그의 지모를 제갈량에 비교하며 칭찬했다. 분노한 군민들을 효과적으로 동원해 적기에 화공작전을 전개한 것이 주효했던 것이다.

 ▶제너럴셔먼호 사건의 영향

 조선의 승리는 훗날의 비극을 잉태하는 단초가 됐다. 한동안 제너럴셔먼호 사건은 미궁에 빠져 있었다. 그러다가 미국이 ‘1866년 8월의 사건’에 대한 정황을 알고서 조선에 접근해 왔다. 조선 해역에 군함을 파견해 수차례 조사활동을 벌인 미국은 사건의 전모를 파악한 뒤 출병해 개항과 통상조약을 요구해 왔다. 프랑스와 공동 출병이 논의됐지만 프랑스의 거부로 단독 출병했다. 사건의 책임을 규명하고 통상조약을 체결한다는 것이었다. 가공할 위력의 포성이 머지않아 강화 앞바다에 울려 퍼질 것이 분명했다.

<백기인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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