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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9.11 16:2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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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제목 : [국방일보]기획-국난극복사<65>‘쇄국 조선’과 병인양요

<65>‘쇄국 조선’과 병인양요

‘병인박해’ 빌미 佛 함대 두 차례 조선 침공 / 2012.08.29

조선군, 은밀하고 집요한 작전으로 완전한 승리

양헌수 전쟁기념관 제공 사진

덕포진에서 바라본 강화해협. 필자 제공 사진

제너럴셔먼호 사건 직후 2개월도 채 안 된 1866년 9월 말 프랑스군이 들이닥쳤다. 리델(Ridel) 신부가 천신만고 끝에 조선을 탈출해 산둥의 프랑스 극동함대사령부에 병인박해의 전말을 보고한 것이다. 로즈 제독은 즉각 조선에 무력응징을 결정했다. 조선의 쇄국정책이 불러온 두 번째 참화였다.

▶프랑스 함대가 조선을 침공하다

 프랑스 함대는 두 차례 조선을 침공했다. 첫 번째는 9월 18일부터 10월 1일까지다. 3척의 프랑스 함대가 팔미도를 거쳐 강화도를 통과해 한강의 수로 탐사에 나섰다. 그들이 한강 하구인 염창항의 차단선을 뚫고 들어오자 충돌이 벌어졌는데, 조선군의 차단선을 일시에 붕괴시킨 프랑스군이 양화진을 지나 서강 어귀에 이르렀다. 그러나 모래톱에 좌초돼 결국 산둥의 즈푸 항으로 철수해야 했다.

 두 번째 침공은 10월 12일의 일이다. 프랑스군은 일본과 청국에서 모은 7척의 군함으로 남양만에 나타났다. 14일 그들은 강화해협을 30㎞나 거슬러 올라 갑곶진 해상까지 진출했다. 아무런 충돌도 없었다. 강화성이 접전지였다. 단시간에 조선군이 무력화됐다. 강화부를 수색한 프랑스군은 다수의 은덩이와 문서를 노획했다. 프랑스 정부가 반환하기로 한 외규장각의 고도서 345권이 이때 약탈당한 것이다.


▶조선군, 대군에 일격을 가할 준비를 하다

 강화성 동문이 돌파되던 날, 15일 조선은 한강방어책을 수립했다. 그날 정족산성의 영웅인 양헌수(1816~1888)는 한강방어작전사령부인 순무영의 순무천총에 임명됐다. 당시의 생생한 전투기록이 그가 기록한 ‘병인일기’에 남아 있다.

 18일, 양헌수는 통진에 도착했다. 임시주둔지를 설치한 후 그는 ‘서양 함장을 규탄하는 격문’(討洋舶都主檄)을 써 보냈다. 프랑스군은 이를 일축했다. 일전이 불가피한 듯했다. 양헌수는 우선 정찰을 했다. 지리에 밝은 주민을 앞세우고 통진 뒷산에서 강화해협과 갑곶 나루 일대를 살폈다. 지형의 이점을 최대한 이용해 포내리와 덕포 나루에는 수십 명의 병력을 배치했다.


▶한성근과 양헌수 부대의 용전

 양헌수 군이 도하용 선박이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조정에서는 21일 한성근(1833~1905)을 순무 초관에 임명해 문수산성으로 보냈다. 끝내 산성은 빼앗겼지만, 조선군은 기습공격으로 프랑스군 5명을 사상시켰다. 그 공으로 한성근은 ‘전쟁영웅’이 돼 별기군(교련병대)의 지휘관을 거쳐 한성판윤을 지냈다. 그의 일대기가 ‘병인양요 -일명 한 장군전’으로 전한다.

 한편, 양헌수는 작전을 바꿨다. 현지 선박으로 강화도로 직접 잠입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미 10여 일이 지체된 까닭이다. 그런데 덕포를 정찰하던 중 건너편의 한 고성을 발견했다. 정족산성이었다. 단박에 전략거점이 될 수 있다고 직감한 그는, 은밀하게 해협을 건너 그곳으로 잠입하기로 했다. 곧바로 향포수와 경초군 등 500명을 끌어모았다.

 작전이 시작됐다. 야간에 250여 개의 면포대를 만들고 각기 2일분의 양식과 절편을 나눠줬다. 11월 6일 38명의 선발대가 덕포로 이동하고 후속부대도 합류했다. 하지만, 부대원들이 지쳐 있었다. 이때 양헌수의 기지가 빛났다. 칼을 빼든 카랑카랑한 그의 목소리가 전열을 울렸다. 병사들이 생기를 되찾았다. 마침내 500여 명의 조선군이 산성에 집결을 완료했다. 공포에 떨던 주민도 성원을 보냈다. 그들이 가져온 열두 마리 소와 술, 쌀과 고기로 병사들의 사기가 충천했다. 양헌수는 제문을 짓고 흑소를 제물로 삼아 산신제를 올려 필승을 다짐했다.


▶최후의 일전과 조선군의 승리

 프랑스군도 조선군의 작전상황을 알아챘다. 로즈 제독은 올리비에 대령에게 직접 정찰을 지시했다. 그러나 조선군을 발견하지 못했다. 11월 8일 정찰대가 산성 가까이 이르자 조선군이 잠시 모습을 내비쳤다. 의병지계(疑兵之計)였다. 프랑스군이 즉각 응사했다. 그들은 두 개 조를 편성해 산성 동문과 남문을 공격했다.

 오후 2시, 적 선두부대가 성벽 앞까지 접근했고 올리비에 본대도 백 미터 전방까지 다가와 있었다. 조선군은 최대한 기다렸다. 드디어 조선군의 총구가 일제히 불을 뿜었다. 프랑스군은 당황했다. 출발할 때 숙영지에서 대포도 가져오지 않았다. 전세가 불리했다. 조선군의 공격은 집요했다. 30여 분이 지났다. 프랑스군 수십 명이 나뒹굴었다. 조선군은 전사 한 명에 약간의 부상이 있었을 뿐이다. 조선군의 완전한 승리였다. 이번엔 프랑스군의 장비와 의류가 전리품이 됐다.


▶프랑스군의 철수

 양헌수군은 프랑스군의 재차 공격에 대비했다. 그러나 상륙(10월 14일) 이래 근 한 달이 지난 프랑스군이 원정을 포기했다. 11월 10일 그들은 전면 철수했다. 그리피스(W. E. Griffis)는 ‘은둔의 나라’(Corea, The Hermit Nation)에서 당시 프랑스군이 병인양요에서 패함으로써 극동에서 서양인들의 안전이 무너지게 됐다고 썼다. 청국에서는 반(反)프랑스 감정이 고조돼 천진 학살사건(1870년 6월)이 일어났다. 서양인들은 그 모든 것이 로즈 제독의 조선원정이 실패한 데 기인한 것이라 믿었다

<백기인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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