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일 장군은 별 다섯 개를 의미하는 오성(五星) 장군이다. 그는 국군 최초의 원수(元帥)나 다름없다. 여기에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일찍이 중국군에서 소장까지 승진한 김홍일은 광복 후 귀국해 국군 중장까지 달고 전역한 후 자유중국 대사로 임명됐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1년 9월 그를 자유중국 대사로 임명한 자리에서 “김 장군이 군인으로서 우리나라에 기여한 공로를 생각하면 오성 장군으로 제대시켜야 하는데, 우리 군에 그런 제도가 없다고 해서 그리 못했습니다. 하지만 김 장군은 우리나라 별 세 개에다 중국 별 두 개를 보태면 오성 장군과 마찬가지”라며 그의 군공(軍功)을 치하하며 위로했다.
그는 1898년 9월 중국 단동 대안에 위치한 평북 용천군 양하면 오송리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때 밖으로는 영국·러시아 등 서구 열강세력들이 중국 대륙 진출을 기도하고 있었고, 안으로는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 세력을 구축하고자 독일·프랑스·러시아가 일본을 견제하는 정책을 취했다.
이에 민비가 친러정책을 지향하자 일본은 범궐(犯闕)해 민비를 살해하고 한반도 지배를 놓고 러시아와 각축을 벌이던 험난한 시기였다.그는 어려서 사서(四書)를 독파했고, 부친이 세운 풍곡제라는 학교에서 신학문을 익혔다. 그 후 만주 봉천의 소학교에 다니다가 이승훈 선생이 세운 오산학교에 편입해 수석으로 졸업했다. 이때 조만식 선생이 교장이었다.
졸업 후 그는 이승훈의 추천으로 황해도 신천의 경신학교 교사로 지내다가 일본 경찰과 충돌 후 중국으로 건너가 귀주강무학교에 입학, 1920년 중국군 장교로 임관했다(22세). 그는 중국군에서 지휘관(소대장·중대장·연대장·사단장)과 고급참모(군단·군사령부 참모처장) 등 다양한 직책을 역임하며 1939년 중국군 소장에 진급했다(41세).
그는 1945년 광복군사령부 참모장이 돼 중국군에서 나왔으나 광복 후 만주지역 한인 교민의 안전을 위해 중국군 소장으로 복귀해 만주접수군사령부 한국교민처장으로 일하다가 1948년 8월 28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뒤늦게 귀국했다. 그는 1948년 12월 10일 국군에 입대, 준장으로 바로 임관했다. 이때 김홍일 장군과 함께 이응준·채병덕·송호송·손원일이 준장으로 진급했다.
그는 2개월도 안 된 1949년 2월 4일 채병덕·이응준·손원일과 함께 다시 소장으로 진급했다(51세). 그는 육군사관학교장을 지낸 후 육군참모학교장 때 6·25전쟁을 맞았다. 그는 개전 초기 채병덕 총장의 지시로 육본 전략지도반장으로 총장을 대신해 서부전선의 1사단을 방문, 전선 상황을 점검한 후 한강 이남 철수를 총장에게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서울 방어의 최후 보루인 미아리 전선이 무너지자 채 총장은 중국군에서 대부대 지휘 경험이 있는 유일한 장군인 김홍일 소장에게 시흥지구전투사령관의 막중한 직책을 줘 한강 방어 임무를 맡아 달라고 간청했다. 이에 그는 후퇴한 병력을 수습해 3개 혼성사단을 긴급 편성, 6월 28일부터 7월 3일까지 북한군의 한강 도하를 저지해 미군 증원의 기틀을 마련했다.
이후 육군본부의 지휘 부담을 줄이고 사단을 효율적으로 지휘하기 위해 국군 최초로 1군단이 창설되자 군단장에 임명돼 낙동강 방어선에 이르는 치열한 지연전을 전개, 이를 훌륭히 수행했다.
그는 후진을 위해 군단장직을 용퇴한 후 육군종합학교장으로 재직 중 대통령 특명으로 1951년 3월 중장 진급(53세) 후 전역하고 자유중국 대사로 부임했다. 그는 3년도 안 된 굵고 짧은 군 복무를 통해 국가가 가장 어렵고 힘든 시기에 구국의 투혼을 발휘, 조국을 구한 명장으로 청사(靑史)에 길이 남아 있다.
<남정옥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