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군기에 힘겨운 동족상잔의 비극을 치러야 했던 국군은 육탄으로 적을 저지하면서 유엔의 지원으로 가까스로 정전을 맞이하게 됐다. 1953년 7월 27일 체결된 정전협정은 한반도에서 무력충돌 방지와 위기관리를 위한 제도적 장치로서 기능해 왔다. 엄격하게는 유엔의 중재에 의한 교전 당사국의 적대행위의 중지이기 때문에 정전(Truce)에 해당되지만 협정문의 영어본에 휴전(Armistice)이라 쓰여 있어 구분없이 혼용되고 있다.
정전협정에 따라 이뤄진 정전체제는 한반도의 평화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관리해 온 평화체제로서 현실적으로 비무장지대의 설치와 정전관리기구인 군사정전위원회(MAC) 및 중립국 감시위원회에 의해 관리돼 왔다. 정전협정하에서 군사정전위원회와 중립국 감시위원회는 정전협정의 이행을 효율적으로 보장하기 위해 적극 노력해 왔으며, 그 결과 55여 년 간 한반도의 평화가 안정적으로 유지됐다.
그러나 91년 3월 25일 유엔사 군정위 수석대표에 한국군 장성이 임명된 이후 북측이 군정위 본회의 참가를 일방적으로 거부해 군정위가 정상적으로 운영되지 못하고, 군정위 비서장회의와 참모장교회의가 그 기능을 대신했다.
북한은 92년 발효된 ‘남북기본합의서’에 한반도에서 공고한 평화상태가 정착될 때까지 현 정전협정의 준수를 합의했음에도 불구하고 93년부터 정전체제의 무력화를 위한 조치를 강행했다. 북한은 93년 4월 3일 체코대표단을 철수시켰고, 이듬해인 94년 4월 28일에는 북한 측 군정위를 철수시켰다. 그해 5월 24일 이른바 ‘조선인민군 판문점대표부’를 설치했으며, 12월 15일 군정위 중국군 대표를 철수시켰다. 그리고 95년 2월 28일에는 폴란드 대표단을 강제로 철수시켰다.
이에 반해 한국과 유엔사는 정전협정이 존재하는 한 군정위와 중감위가 계속 유지돼야 한다는 입장에서 유엔사 측 군정위와 중감위를 계속 가동해 왔다. 그러나 북측은 95년 3월 2일 군정위를 대신해 미북 장성급회담을 개최할 것을 공식 제의하는 등 정전협정 무력화를 노골화했다. 국방부와 유엔사는 정전체제의 틀 안에서 한반도 위기관리를 담당할 수 있는 책임있는 대화창구가 필요하다는 판단에서 98년 2월 11일 유엔사 - 북한군 장성급회담(판문점 장성급회담)을 북측에 제의했다.
북측이 아측의 제안에 호응해 옴으로써 98년 3월 3일부터 5월 29일까지 7회에 걸쳐 비서장급 및 참모장교 접촉이 이뤄졌다. 그리고 98년 6월 8일 판문점 장성급회담 절차에 합의·서명했다. 이로써 정전체제의 관리는 판문점 장성급회담에 의해 이뤄졌는데, 98년 6월 23일 제1차 판문점 장성급회담이 개최된 이후 2002년 9월까지 모두 14차례의 회담이 개최됐다.
회담에서는 주로 정전협정 위반행위에 대한 원인과 책임을 규명하고 상호 간의 군사적 관심사항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다. 특히 제12·14차 회담에서는 남북 철도·도로 연결공사와 관련해 ‘비무장지대 일부 구역개방에 대한 합의서’를 서명·발효시킴으로써 동·서해지구 철도·도로를 이용해 남북교류협력사업을 추진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었다.
현재 판문점 장성급회담은 제14차 회담 이후 별다른 진전 없이 한반도의 정전체제를 관리하는 기구로 존속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북한은 유엔사 해체의 입장을 계속 유지하면서 남·북·미 3자 군사공동기구의 구성을 주장하고 있다. 한편 2005년 6자회담에서는 관련 당사국들이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체제에 관한 협상을 갖기로 합의함으로써 북핵 문제와 한반도의 평화정착 문제가 연계되면서 이제 한반도의 정전체제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백기인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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