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2사단은 6·25전쟁 때 미 본토에서 최초로 한국에 증원돼 미군 사단 중 가장 많은 전투를 치른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부대다. 사단은 인디언헤드·천하제일(second to none)·한국에서의 자유수호 부대라는 긍지와 자부심을 지니고 있다.
1917년 창설된 사단은 미 본토보다 한국에 더 오래 주둔한 ‘미국 국적의 한국군 사단’이나 다름없다. 91년의 역사를 지닌 사단은 미 본토에서 40년, 한국에서 47년, 유럽전선에서 4년을 주둔했다.
사단은 한국방위를 통해 미국을 지켰다. 1917년 10월 26일 프랑스 부르몽에서 창설된 사단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고 제2차 세계대전 시에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참가, 패튼 장군이 지휘한 미3군의 최선봉 부대로서 적에 섬멸적인 타격을 가하며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소련군과 최초로 조우한 부대다.
6·25전쟁 때 워싱턴 주 포트루이스에 주둔하고 있던 미2사단(9·23·38연대)은 본토 최초의 증원군으로 차출돼, 1950년 7월 23일 순차적으로 한국전선에 전개해 싸우다 8월 24일 사단 전체가 도착하자 낙동강 돌출부(현풍~영산)를 담당하고 있던 미24사단과 교대했다.
미2사단의 선착(先着)으로 미 증원병력 도착 전에 부산을 점령, 전쟁을 종식하려 했던 북한군의 남침전쟁계획이 무산됐고, 예비병력 부족으로 지휘의 융통성에 많은 제약을 받던 미8군사령관 워커 중장은 비로소 병력 운용에 숨통을 트게 됐다.
낙동강 전선에서 미2사단은 북한군 2개 사단(2·10사단)을 격퇴하고, 인천상륙작전 후에는 미9군단에 배속돼 한국의 남서부지역에서 북한군 잔적 소탕과 후방경계임무를 수행했다. 이때 사단은 미 극동군사령부의 명으로 인디언헤드특수임무부대를 편성, 점령지역 평양에 있는 막대한 양의 적 문서를 수집해 워싱턴에 보냈다. 중공군 개입 후 청천강으로 북진, 미8군의 크리스마스 공세에 참가했다.
이때 사단이 군우리 철수과정에서 중공군에 퇴로가 차단된 채 계곡에서 적의 협공을 받고 엄청난 피해를 입자, 사단 해체가 결정됐으나 미2군사령관(밴 플리트 중장)의 변호로 위기를 모면했다. 밴 플리트는 “미2사단은 장구하고 영예로운 역사를 지닌 우수한 부대다. 사단을 재편성해 다시 전선에 배치해야 한다.
사단에는 자신들이 적으로부터 도망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능력이 제대로 발휘될 수 없는 상황에서 적과의 월등한 전력 차이로 패배했음을 입증하기 위해 전투에 임하려는 우수한 장교들이 많다”고 변호했다. 이후 사단은 수원에서 재편성과 지휘부 쇄신을 통해 새로운 부대로 거듭났고, 프랑스·네덜란드군을 배속해 전력도 증강했다.
이때부터 사단은 한국전선에서 가장 어렵고 중요한 전투에 참가해 지상전투 승리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사단은 1951년 2월 원주지구전투를 시작으로 지평리(23연대)·벙커고지(38연대)·피의능선(9연대)·단장의능선(23·38연대) 전투에서 공산군에 궤멸적 타격을 주며 북진했다.
특히 지평리전투에서는 유엔군 중 최초로 중공군을 격퇴함으로써 ‘신비스러운 중공군’에 대한 기존의 두려움을 불식시켰고, 중동부 산악전투에서는 인디언처럼 그 용맹을 과시하며 미군도 산악지형에서 잘 싸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이후 사단은 불모고지·포크찹 전투를 통해 3번 도로를 위협하는 역곡천 일대의 전략적 요충지 확보에 기여했으나, 한국의 자유수호를 위해 2만5000여 명(전사 7094명·부상 1만6237명·실종 186명·포로 1516명)의 피해를 입었다.
천하제일을 표방하며 한국의 영원한 우군으로 남아 있는 미2사단은 한미연합군의 핵심전력으로 오늘도 한국안보를 위해 잠시도 대북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다.
<남정옥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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