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때 이승만 대통령은 국군통수권자로서의 역할과 소임을 다했다. 80세를 바라보는 노령에도 불구하고 그는 매주 전선시찰을 통해 장병들을 격려하고 사기를 진작했다. 그를 ‘한국 현대사의 가장 위대한 사상가·학자·정치가·애국자’라고 칭송했던 미8군사령관 밴 플리트 장군은 전쟁이 끝난 다음 이승만의 당시 모습을 이렇게 회고했다.
“그는 내 재임 거의 2년간을 평균 1주일에 한 번씩 나와 함께 온갖 역경을 마다않고 전방과 훈련지역을 시찰했다. 추운 날 지프를 타야 할 때면 죄송하다는 내 말에 미소로 답하고는 자동차에 올랐다. 목적지에 도달할 때까지 그의 밝은 얼굴과 외투 밖으로 보이는 백발은 검은 구름 위에 솟은 태양처럼 빛났다”고 회고했다.
그는 장병들과 고난을 같이한다는 애군(愛軍)정신으로 계절이나 기후에 관계없이 노구(老軀)를 이끌고 전선지역을 방문, 격려했다. 그의 전선시찰은 한여름의 폭염과 장마, 겨울의 혹독한 추위에 관계없이 전쟁이라는 가장 어려운 상황 속에서 이뤄졌다.낙동강 전선의 최대 위기인 영천전투가 끝날 무렵 이 대통령은 영천의 국군8사단을 방문하고 격려했다.
이때 주변에는 적의 박격포가 떨어지는 상황이었다. 또 그는 1952년 10월 중부전선에서 백마고지를 놓고 중공군과 혈전을 치르고 있는 국군9사단을 방문해 “귀관들이 막강한 미군 사단들 못지않게 용감하게 싸워 국위를 선양하고 있기 때문에 내가 용기를 얻어 국정을 보살피고 있다”고 격려했고, 부상병들에게 “후방에 있는 사람들이 이 사실을 잘 새겨 둬야지…”라며 눈물을 머금은 채 말문을 잇지 못했다.
대통령의 격려를 받은 김종오 사단장은 “노(老) 대통령이 내 손을 꼭 잡고 눈물을 적실 때 가슴이 멨으며, 기필코 이 전투를 이기고야 말겠다는 각오를 다지게 됐다”고 술회했다. 이 대통령은 백마고지 전투에서 국군9사단이 승리하자 이를 격려하기 위해 부슬비가 오는 궂은 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경비행기로 전선지역을 방문, 사단 장병들을 감읍(感泣)케 했다.
특히 그는 1951년 9월 중동부전선의 최대 격전지인 단장의 능선 전투를 앞둔 장병들을 격려하기 위해 부산에서 양구의 펀치볼까지 쌍발기와 연락기를 번갈아 타고 최전선지역을 방문했다. 그가 탄 연락기는 조종사 뒤에 겨우 한 사람이 앉도록 마련된 뚜껑이 없는 비무장 소형비행기였다.
대통령이 전선시찰을 마치고 임시 경무대가 있는 부산으로 복귀할 때 기상악화로 부산에 착륙하지 못하고 연료 부족으로 대구로 회항하라는 지시를 받았으나 그곳도 짙은 구름에 휩싸여 착륙할 수 없게 되자 할 수 없이 옅게 안개가 깔린 포항 근처 비행장에 불시착했다. 예정에 없던 비상착륙으로 뒤늦게 연락을 받은 인근부대에서 대통령 일행을 태울 차량을 보냈다.
저녁 7시 30분쯤 비행장 근처의 소령이 지휘하는 부대에 도착한 대통령 일행은 먹다 남은 음식을 데워 먹은 후 폭우가 그치기를 기다려 밤 11시 지프에 분승, 인근역으로 이동해 열차를 타고 부산에 도착했다. 그날은 혈기왕성한 젊은이에게도 힘든 하루였으나 그는 내내 웃음을 잃지 않고 농담을 하며 주위 사람들을 위무(慰撫)했다.
이 대통령의 전방시찰은 날씨나 기후에 관계없이 이른 새벽이나 늦은 밤에 움직여야 했기 때문에 어렵고 힘들었으나, 그는 늙은 어버이가 사랑하는 자식을 찾아가듯 밝고 활기찬 모습으로 전선지역을 방문, 상무정신에 바탕을 둔 국가수호정신을 역설했다. 그는 전선시찰을 통해 자칫 후방에서 망각할 수 있는 통수권자로서의 막중한 책무를 추스르는 한편, 죽음을 앞두고 작전에 투입될 장병의 사기를 앙양시키는 진정한 국군의 통수권자였다.
<남정옥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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