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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8.11 10:4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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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관리자
제목 : [국방일보]다시보는 6·25-<79>국군헌병총사령관 원용덕 장군과 반공포로 석방
다시보는 6·25 - [군사기획]
<79>국군헌병총사령관 원용덕 장군과 반공포로 석방
李대통령 비밀지령 받고 철저한 보안속 처리

세인(世人)들은 이승만 대통령의 용인술에 대해 ‘외교에는 귀신이나 인사에는 등신(等神)’으로 곧잘 비유한다. 이처럼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외교의 신’이었다. 국제무대를 주름잡던 미국을 능수능란하게 다루며 오히려 워싱턴의 외교가를 리드한 것에서 그의 외교역량은 입증됐다.

워싱턴뿐만 아니라 한국을 도우러 온 미군 장성들조차 그의 이러한 능력에 감탄해 마지않았다. 또 세평(世評)과 달리 그는 인사에도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 그는 전쟁을 수행하면서 국가위기가 있을 때마다 그 일을 감당해 낼 수 있는 적임자를 골라 쓰는 최상의 인사정책을 썼다. 특히 그는 주요 고비마다 역량 있는 장군들을 기용해 이를 해결했다.

그는 전쟁 동안 미군과의 협조나 야전에 대해서는 주로 백선엽 장군에게 일임했고, 그 외 군사문제는 국군헌병총사령관 원용덕(元容德) 장군이나 특무대장 김창룡(金昌龍) 장군을 활용했다. 이런 점에서 이들 장군은 이대통령에게 어금니(molar)와 같은 존재였다.

특히 국군헌병총사령관 원장군은 이대통령을 적극 보좌해 국가적 난제를 해결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이대통령의 용단과 원장군의 적극적인 수명(受命)으로 꽃을 피운 반공포로 석방이다. 아침에 이 뉴스를 듣고 면도하던 영국 처칠 수상은 놀란 나머지 얼굴을 베었고, 덜레스 국무장관은 잠자고 있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깨울 정도로 이것은 ‘빅(big) 뉴스’였다.

이는 자유우방국뿐만 아니라 적대국 공산 측에도 일대 사건이었다. 이제까지 공들여 온 휴전이 파산될까 봐 미국 등 자유우방국과 공산권 국가들도 대책 마련에 부심할 정도로 그 파장은 넓고 깊었다. 그것은 누구도 예측 못 한 휴전협상 막바지에 몰아닥친 ‘이승만의 해일(海溢)’이었다.

이렇게 대담하고 엄청난 일을 이대통령과 원장군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해냈다. 이대통령은 국군지휘관에게 혹여 해가 될까 봐 백선엽 육참총장을 비롯해 군 수뇌부에게 비밀로 했다.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비밀지령을 받은 원장군이 철저한 보안속에 이 일을 처리했다.

이대통령은 이를 위해 이미 3개월 전인 53년 3월 24일 대통령령 제153호에 의거 국군헌병총사령부를 국방부 내에 설치했고, 원용덕 육군소장을 중장 진급과 동시에 헌병총사령관에 임명했다.

그리고 휴전협상의 마지막 관문인 포로문제가 타결되기 2일 전인 53년 6월 6일 원장군을 경무대로 불러 포로석방 문제를 비밀리에 연구하도록 지시했고, 원장군은 포로문제가 타결된 6월 8일 경무대로 이대통령을 예방했다. 이 자리에서 대통령은 “나의 명령이니 반공한인애국청년들을 석방하라. 가만(可晩)”이라는 친필명령서를 전수했다.

원장군은 대통령의 밀명을 은밀히 진행시켰다. 이 일은 국방장관과 육참총장에게도 비밀로 했다. 모든 일은 육군헌병사령부와 포로경비부대를 통해 진행됐다. 작전은 6월 18일 0시에 개시돼 반공포로 2만7000명이 석방됐다. 6월 19일 새벽 6시 원장군은 중앙방송국에서 반공포로 석방에 대한 담화문을 발표했다. 그의 목숨을 건 대명(大命)이 성공한 순간이었다.

이를 들은 애국학생들은 헌병총사령부 정문 앞으로 몰려들어 “원용덕 장군 만세 !”를 외쳤다. 대통령은 원장군에게 ‘의로운 용기(義勇)’라는 휘호를 하사하며 그의 공을 치하했다. 그 후 그는 풀려난 반공포로들로부터 ‘포로의 아버지’ 대우를 받으며 1968년 63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이런 점에서 그의 공과(功過)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를 기대해 본다.

<남정옥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관>

[국방일보-2008.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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