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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8.18 09:2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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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63
글쓴이
관리자
제목 : [국방일보]다시보는 6·25-<80>6·25전쟁과 학도의용군
다시보는 6·25 - [군사기획]
<80>6·25전쟁과 학도의용군
학업중단 ‘펜 대신 총’ 들고 조국수호 나서

50년 8월 18일은 낙동강선 방어작전의 최대 위기였다. 한반도의 끝자락 낙동강 전선까지 밀린 대한민국은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고 있었다. 이날은 대구역에 북한군의 박격포탄이 떨어지고, 급기야 정부가 대구에서 부산으로 이동하는 등 전황은 갈수록 악화됐다. 종심(縱深)도 없이 종잇장처럼 얇은 방어선을 형성하고 있던 아군은 적의 송곳 같은 공격에 피해가 증대했으나, 병력 충원은 이를 따르지 못했다.

이때 국군의 부족한 병력을 보충해 준 것이 학생들의 자진 참여로 이뤄진 학도의용군이다. 학도의용군(學徒義勇軍)은 6·25전쟁 시 학생의 신분으로 자진해 참전한 의용병이다. 이들은 조국이 누란의 위기에 처했을 때 학업을 중단하고, ‘펜 대신 총’을 들고 조국수호의 대열에 교복을 입고 참전한 학생들이다.

흔히 학도의용군은 학도병·학병 등으로 호칭되고 있지만, 학생 신분으로 자발적인 참여와 조선시대 국가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당시 행동하는 지식인이었던 유생과 이땅의 민초들이 자발적으로 ‘의병’을 조직해 항거한 역사적 사실(史實)과 그 궤를 같이한다는 점에서 학도의용군이 가장 적합한 용어라 사료된다.

6·25전쟁 때 학도의용군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된다. 첫째는 국내에서 학생의 신분으로 전투와 지원활동을 했던 국내 학도의용군이고, 둘째는 대한민국 국적을 지닌 채 전쟁에 참전한 재일 학도의용군이다. 병역법상 국내 학도의용군은, “50년 6월 29일 이후 학도의용군으로 육·해·공군 또는 유엔군에 예속돼 51년 2월 28일 해산할 때까지 근무한 자로서 전투에 참가하고 그 증명이 있는 자”를 말한다.

여기서 6월 29일은 수원에서 조직된 비상학도대(非常學徒隊) 결성일을 지칭하고, 51년 2월 28일은 정부의 학도의용군 해산 명령일을 뜻한다. 하지만 학도의용군 시작·종료 시기에 이견이 있다.

즉, 인천학도대는 6월 26일 조직해 27일부터 활동했고, 또 51년 2월 28일 정부의 해산령에도 활동을 계속해 이승만 대통령이 51년 3월 16일 “학생 학교 복귀 지시 담화”를 발표했으나, 정훈공작대(政訓工作隊)는 4월 3일 해산된 점을 고려할 때 그 시점과 종료를 50년 6월 25일부터 51년 4월까지로 해야 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이에 따르면 “학도의용군은 6·25전쟁 발발 시부터 51년 4월까지 대한민국 학생의 신분으로 지원해 전투에 참여하거나 공비소탕·치안유지·선무공작에 참가함으로써 군과 경찰업무를 도왔던 학생 혹은 단체”로 확대해야 된다는 것이다.

‘국가유공자에 관한 법률’에서 재일 학도의용군은 “대한민국 국민으로 일본에 거주하던 자로서 50년 6월 25일부터 53년 7월 27일까지 국군·유엔군에 지원 입대해 6·25전쟁에 참전하고 제대된 자”다. 하지만 이것도 참전 주체를 명확히 하기 위해 ‘일본에 거주하던 자’를 ‘재일학생 신분’으로 변경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재일 학도의용군은 대한민국 국적의 재일학생 신분으로 전쟁 발발부터 휴전까지 국군·유엔군에 지원 입대하거나 개인 자격으로 지원해 전쟁에 참전하고 제대된 자”로 그 의미를 정확히 해야 된다는 것이다.

6·25전쟁 시 학도의용군은 총 30여만 명이 참가해 그중 5만여 명(재일학생 641명 포함)의 전투 참가와 20여만 명의 후방선무·공작활동을 하다가 7000여 명이 군번·계급도 없이 장렬히 싸우다 산화했다. 가장 어렵고 힘든 시기에 조국수호를 위해 그들이 바친 선홍빛보다 붉은 애국심은 대한민국 수호의 영원한 상징이 됐다.

<남정옥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관>

[국방일보-2008.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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