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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03 08:5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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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06
글쓴이
관리자
제목 : [국방일보]국군발달사-<31>군 언론·홍보-신문잡지 편
[군사기획] - 국군발달사
<31>군 언론·홍보-신문잡지 편
6·25전쟁 당시 ‘승리일보’ 발간…軍신문의 효시

우리 군은 건군 때부터 국방부 정훈부가 주축이 돼 군 홍보나 사상무장에 관한 보도매체로서 정훈교정을 비롯해 월간 정기물로 ‘국방’과 같은 잡지를 발간했다. 그리고 국방뉴스와 국방 시리즈로 평화선·별 등의 영화도 제작했다. 6·25전쟁 중에는 ‘승리일보’를 발간해 전투의지와 사기를 진작시켰고, 군사영화촬영소에서는 ‘정의의 진격’(1·2부)을 만들어 세계 각국에 전하며 한국군을 선양했다.

당시 발간된 ‘승리일보’는 군 신문의 효시로 간주된다. 그러나 그것은 기획이나 예산의 뒷받침 없이 이뤄진 일시적인 발간물이었다. 환도 직후 국방부가 민간에 위탁한 ‘국방신문’이 잠시 발간됐으나 이 역시 몇 호에 그치고 말았다. 이후 국방부 차원에서 군사대변지 발간에 대한 예산 확보와 제도화가 면밀히 검토됐다.

육·해·공군, 해병대가 군별로 발간하던 신문이나 월간지의 잡다한 발간을 국방부 차원에서 통합하려 했지만 각군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다. 정치권도 군 정치교육 운운하며 반대했다.군 신문의 본격적인 발간은 5·16 이후에야 이뤄졌다. 그러나 국방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창간은 3년이 지난 64년에 가서야 구체화했다.

그해 2월 중순, 김성은 국방부장관은 국군의 독자적인 일간신문 발간에 착수하라는 지시를 정훈국장 홍종락 이사관에게 내렸다. 그리하여 작성된 초안에서는 명칭을 일단 ‘국방신문’으로 하되 타블로이드 배판 양면으로 하고 직원 18명으로 편찬계를 편성하며, 일요일은 제외하고 일간 6만 부를 민간신문사(서울신문)와 계약해 발간한다는 것이었다. 이 정책은 결정과정에서 예산이 다소 축소되고 투입 인원이 11명으로 줄었다.

그런데 그해 9월 홍종락 정훈국장이 경질되고 김병률 신임국장이 취임하면서 편찬계의 규모 확대에 지나지 않았던 일간지 창간사업이 전면 재검토됐다. 그 결과, 신문의 인쇄사업은 일반 신문사와 계약해 발간하지만 독자적인 편집실을 편성해 일반 신문사의 편집국에 준한 규모를 그해 10월 1일까지 갖춘다는 방안을 관철시켰다.

그러나 사무실과 기타 부수시설의 준비가 늦어져 신문 창간은 11월 중에 창간호를 내는 것으로 조정됐다. 그 과정에서 신문의 제호를 놓고 의견이 갈렸지만 결국 이영치 실장이 제의한 ‘전우’(戰友)로 정하고 64년 11월 16일 창간했다. 서울신문사 4층에 편집실을 두고 첫 호를 낸 전우지가 고난과 역경 끝에 고고의 성을 울린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전우애’(戰友愛)라는 휘호로, 김 국방장관은 ‘전우애를 다짐하며’라는 격려사로 축하했다.전우는 67년 1월 1일 대판 2면에서 4면으로 증면했다. 증면에 따라 10명의 기자를 충원해 23명으로 편집실을 편집·취재·문화·교정·사진부의 5개 부로 확대 개편했다. 이때부터 서울신문사를 떠나 남대문에 위치한 현대경제일보에서 편집했으며, 제호도 ‘전우신문’으로 바꿨다.

내용에서는 부대활동상을 담는 현지 취재가 상대적으로 증가했다. 또 베트남에 해외특파원(김진석·이상윤 기자)을 파견했고, 68년 지령 1000호를 돌파한 가운데 향토예비군이 창설되자 취재반을 별도로 운영하며 주 1회씩 예비군 관련 특집판을 펴냈다. 그리고 69년부터 가로쓰기 편집으로 바꿨다.

77년 8월 20일 전우신문은 남대문 셋방살이를 접고 용산2동(산 2번지)에 신청사를 마련해 이전했다. 그 기념으로 8월 22일에는 특집 컬러판(16면)을 제작하기도 했다. 그리고 90년 3월 1일 제호를 국방일보라 했다. 당시 노태우 대통령은 ‘국방일보’의 새 출발을 격려하며 ‘호국필봉’(護國筆鋒)이란 휘호를 내렸다.

편집도 전면 가로쓰기에서 부분 세로쓰기로 개선하며 취재 방법·편집에 일대 혁신을 기했다. 이제 국방일보는, 74년 2월 ‘정훈’으로 창간된 이래 ‘국방’에서 다시 ‘국방저널’로 발전한 자매지와 함께 국내의 중앙 일간지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국방언론의 중추로 자리매김했다.

<백기인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국방일보-2008.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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